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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반세기 전 오늘 국회에 인분 뿌린 김두한의 파란만장한 인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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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깡패로부터 야당 의원 보호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정한 법’에 따라 불의를 응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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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대 민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두한 의원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예외를 둔 개헌(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했다. 거리시위에 나선 김 의원이 경찰의 제지를 받자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무소속으로 당선돼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에 입당한 김 의원은 개헌 이후 자유당을 탈당해 공화당, 진보당 등 야당의 길로 갔다.

딱 50년 전 오늘, 국무총리를 비롯한 일부 각료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오물을 뒤집어 썼다.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 대정부질문을 통해 한국비료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을 추궁하던 김두한 당시 의원은 정일권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향해 미리 준비한 인분을 뿌렸다. 김 의원은 “행동으로 부정·불의를 규탄한다”고 정부를 꾸짖기도 했다. 이로 인해 회의는 중단됐고, 이효상 당시 국회의장의 징계 요구에 따라 국회법제사법위원회는 김 의원의 제명을 결의했다. 이에 김 의원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국회의장 모욕,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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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5월 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민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 책임을 맡은 김두한 당시 의원(오른쪽). 조병옥·장택상 의원 등 야권 지도부가 대거 참여한 이날 강연회는 정치깡패 수십 명이 행사장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는 통에 진행에 차질을 빚었다. 김 의원이 군중 속에 앉아있는 국회의원을 향해 단상 위로 오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월간중앙>은 김두한 전 의원의 미공개 사진을 입수해 공개한다. 김 전 의원과 한때 사업을 같이했던 정윤화(84) 씨가 보관해온 이 사진들은 1940~50년대의 정치 현장을 전하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단군에서 김두한까지−대한민국史>에서 “김두한의 생애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평가한다. 한 교수는 “김두한의 생애는 거품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참으로 파란만장했다”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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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4대 민의원 선거에 앞서 선거사무소를 개설한 김두한(왼쪽에서 둘째) 의원. 김 의원은 노농당 공천으로 종로 을에서 출마했지만 민주당 한근조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65년 용산 보궐선거에서 한국독립당 소속 후보로 당선될 때까지 야인으로 지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5년여의 의원 생활 중 그만큼 당적을 많이 옮긴 사람도 적지만, 아무도 그를 철새라 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과 폭력을 일삼기도 했지만 때로는 군화에 가죽장갑을 낀 모습으로 나타나 정치깡패들로부터 야당의원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한 교수는 김 전 의원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정한 법에 따라 불의를 응징한 인물’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평가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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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종로의 주먹패를 이끌던 김두한은 애국청년단·대한청년단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해방직후 구식 장총 등으로 무장을 갖춘 것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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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민의원 시절 동료 국회의원들과 망중한을 보내고 있는 김두한 의원(오른쪽에서 둘째). 장소는 중앙청 인근의 경회루로 알려졌다.

글 박성현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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