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커피 사이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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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31면

한국은 영토가 큰 나라가 아니지만 한국사람들은 ‘왕 (王)’ 사이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특징은 음식점 메뉴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왕갈비·왕소금구이·왕파전·왕순대·왕만두·왕돈까스·왕냉면’. 리스트는 한없이 늘어날 수 있다. 최근엔 킹 사이즈의 ‘왕커피’까지도 나왔다.


지난 7월 초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세미나 참석차 지방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뼛속까지 비를 맞은 채 세미나 대기실의 원탁 테이블에 앉아있다가 바로 눈앞에 놓인 커다란 ‘컵커피’를 보게 됐다. 양은 400ml나 됐으며,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방커피’였다. 지난 10년 사이 한국의 커피 사이즈가 자판기에서 뽑아 먹는 50ml에서 ‘왕’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400ml까지 커진 이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뒤 서서 친구들이나 동료와 커피 타임을 즐겼던 시대와 비교하면 21세기 한국 사람들은 그 당시보다 더 잘 살고 더 잘 먹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서울엔 없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먹을거리와 음식이 다양하고 풍성하다. 태국 망고, 필리핀 파파야, 호주 체리 등 이전에는 이름도 잘 몰랐던 과일을 이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거의 생활필수품화되다시피 했다. 망고가 없으면 뜨거운 여름에 빙수를 못 먹을 정도가 됐다. 커피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사람도 주변에 많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책상 한 켠에 두고 쪼로롭 마시는 달콤한 커피, 그야말로 힐링 타임이 따로 없답니다’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점심·저녁 식사 후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안 마시면 식사의 즐거움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빠졌다는 허전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은 옛말이 돼버렸다. ‘금강산도 식, 커피 후경’으로 바뀌어야 맞을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굳어져 가고 있다. 커피문화 강자인 이탈리아보다 서울거리에 카페가 훨씬 더 많고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더 많다. 살림살이만 걱정하고 자판기 커피만 즐겼던 시대에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간 사람들은 지금 다시 서울을 방문하면 달라진 음식문화에 무척이나 놀라워한다.


그런데 21세기 초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다양해진 만큼 정말 여유로워진 걸까. 커피 사이즈가 커진 데 비례해 고민도 더 커진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이전보다 커피에 들어가는 설탕량도 더 많아졌을 것이다. 당뇨병, 비만 등 성인병 환자도 그때보다 크게 늘었다. ‘왕’ 커피와 관계를 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리나 코르군한국외국어대?러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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