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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비주얼 시대의 대의정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본 정치 선량들이 행정에 무지하다 해도 관료들이 받쳐주는 시스템이라 큰 문제 없어... 한국 486세대의 세계관은 우물 안 개구리, 분산형 포켓몬 세대의 관심권에서 밀려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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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탤런트형 정치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9년 총선 당시 후보들의 벽보로 도배된 도쿄 민주당 선거본부.

‘재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이란 말이 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 경제 전문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이 사용한 신조어로, 저금리·저성장·디플레이션·고령사회로 집약되는 일본형 경제구도를 의미한다.

민심을 점령하라! 탤런트형 정치인들의 진격

이른바 ‘잃어버린 20년’의 흔적이다. 일본화(日本化)라는 말로 풀이될 듯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럽이 경험했고 중국도 이미 재패니피케이션 상태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폴 크루그먼의 진단이다.

일본화는 경제만이 아니라, 일본 문화의 확산이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부정적으로 풀이되는 경제적 관념과 달리,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문화라는 측면에서의 일본화는 디지털을 통한 세계화와 맞물려 있다. 포켓몬고 광풍은 대표적인 예다. 모바일 시대를 대표하는 청년문화 중 하나인 일본 팝 컬쳐다.

망가(マンガ), 패션, 음식, 애니메이션, 음악, 게임과 같은 2류 대중문화인 서브컬처(サブカルチャ?, Subculture)다. 일류라 칭할 수 있는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처럼, 특별한 지식이나 돈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저가의 대중문화가 일본화 영역이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모바일이 확산될수록 한층 더 위력을 발하는, 글로벌 문화의 총아다.

문화의 사각지대인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도 그 바람이 강하다. 20세기 후반 일본의 별명은 테크놀로지 대국이다. 21세기 일본은 서브컬처를 통한 일본화 강국으로 해석된다. 한류(韓流)를 만들어낸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초·중·고등학생은 물론, 20~30대의 문화패턴을 이해한다면 한국 내 일본화의 영향이 얼마나 깊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퍼져가는 일본화 가운데 필자가 실감하는 부분으로 정치에 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경제나 문화만이 아니라, 정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키워드는 탤런트 정치다. 탤런트 정치란, 탤런트처럼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을 내세운 정치를 의미한다.

좁은 의미의 탤런트인 배우나 가수만이 아닌, 아나운서, 기자, 운동선수 최근에는 학계 인사도 포함하는 셀리브리티 정치다. 범위는 텔레비전·영화·비디오 같은 비주얼 지명도에 기초한 인물에 한정된다.


뜨거워져 터질 때까지 불 지피는 것이 트럼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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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선거운동을 펼쳤다.

아무리 유명해도 글·그림에 전념하면서 비주얼 활동에 나서지 않으면 제외된다. <아사히(朝日)텔레비전> 아나운서는 탤런트 정치가가 될 수 있지만, 텔레비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아사히> 수석논설위원은 범주 밖이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인지할 수 있고, 목소리나 언행도 비주얼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이 탤런트 정치의 주역이다.

사실, 탤런트 정치는 일본화만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전 주지사가 탤런트 정치인의 대표적 예일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통령 선거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트럼프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아닌, 방송 지명도를 통해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로 여부를 테스트하는 리얼리티 방송을 통해 내뱉은 “너 해고다(You are fired!)”라는 말 한마디는 트럼프의 이미지 그 자체에 해당된다.

부(富)로 치자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비즈니스맨이 아닌 탤런트 정치가로서 미국 국민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사실, 인종 차별, 막말 같은 얘기를 논외로 할 때, 트럼프가 갖는 대중적 설득력은 남다르다.

민주당의 클린턴 힐러리 후보가 결코 따라갈 수 없는 흡입력이 있는 것이다. 연설을 듣고 있으면 재미있고 뭔가 빨려 들어간다.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인물은 가면을 쓴 듯한 힐러리가 아니라 충혈된 눈으로 핏대를 세우는 트럼프다.

대중의 심리를 움켜쥐는 것이 선동 정치가의 특징이라지만, 사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 보듯, 극단으로 치닫는 선동형 정치가는 많지만, 흡입력은커녕 눈길조차 주기 어려울 정도로 따분하고 시시하다.

머리가 텅 빈 부화뇌동(附和雷同)형 인간이라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대중의 대부분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출처 자체도 불투명한 끔찍한 사진 한 장만으로도 판세 전체가 한순간에 뒤집힌다.

트럼프 현상의 주체는 제 3자의 눈으로 본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거친 숨소리와 땀으로 범벅이 된, 현장의 목소리에 기초한 날 선 정치다. 따라서 뜨거워서 터질 때까지 불을 지피는 것이 트럼프 정치의 핵심이다.

탤런트 정치가 트럼프는 그 같은 대중의 심리를 일찍부터 터득했다. 트럼프 종말을 예견하고 염원하는 사람도 많지만, 트럼프는 결코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바닥에 추락할 듯하지만, 한순간 하늘로 치솟는 초대형 축포로 변할 수 있다. 언젠가 밑천이야 드러나겠지만, 한여름 밤의 휘황찬란한 고감도 불빛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극히 드물다.

탤런트 정치가 미국, 유럽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는 점은 비주얼 시대의 상식에 해당될 듯하다. 그러나 일본의 탤런트 정치는 다른 그 어떤 나라와도 구별되는 특이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통상,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탤런트 정치가의 이미지는 1995년 선거를 통해 등장한 두 명의 신인 지사(知事)에서부터 시작된다. 도쿄(東京)도 지사로 당선된 아오시마 유키오(?島幸夫)와 오사카부(大阪府) 지사에 오른 요코야마 노쿠(?山ノック)라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일순간 나타났다가 불명예 속에서 사라진 일본 정치의 희극이자 비극에 속한다. 아오시마는 원래 방송작가로 필명을 떨친 인물로, 텔레비전을 통해 종횡무진 활약한 스타 평론가다. 당시 아오시마의 경쟁자는 자민당 공천을 얻은, 정부 관료 출신의 이시하라 노부오(石原信雄)였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아오시마는 논란이 됐던 도쿄 만국박람회문제를 최대 이슈로 꺼낸다. 도쿄도 예산이 적자로 돌아선 판국에 일회성 이벤트인 만국박람회 개최를 중단하겠다는 것이 공약 1호다.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 아오시마의 최대 공약이다. 선거운동 기간 중 특유의 입심을 통한 탤런트 셀리브리티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도쿄 시민들이 잊고 싶어하는 ‘악몽의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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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인들은 선거 이전뿐만 아니라 당선 후에도 꾸준하게 자신의 책을 펴낸다.

관료 출신의 자민당 후보 이시하라는 대중을 흥분시키거나 재미있게 만드는 캐릭터가 아니다. 때마침 버블경제 종언과 함께 불어닥친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무당파 바람으로 이어진다. 자민당의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무당파 아오시마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그러나 지사 당선 후 아오시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등학생조차 의심할 정도인 수준 미달의 행정능력이 노출된 것이다. 만국박람회 중단이란 ‘거대한 업적’만 남긴 채 아예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해외여행 등으로 5년간 업무를 마친다. 재선에 나서지 못한 것은 물론, 도쿄도 시민들이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악몽의 정치가 1호로 전락한다.

1995년 오사카 지사로 당선된 요코야마는 원래 음악을 통한 만담가이자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무당파 바람에 힘입어 여유 있는 표차로 오사카 수장에 오르고 1999년 선거에도 나가 재선된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곧바로 미군부대에서 일한 ‘패전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준 입지전적 인물로도 추앙된다. 오사카부 지사를 지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에서 보듯, 오사카인은 정통과 직계보다는 이단과 방계에 주목하는 정서로 유명하다.

한국인의 정서와 닮은 부분일지 모르겠지만, 도쿄대학보다 무학(無學)의 학벌, 성공한 비즈니스맨보다 가난한 생활보호대상자가 튼튼한 커리어로 작용하는 곳이다. 1기 재임 중에는 지사직과 더불어 오사카 사투리로 무장한 탤런트로 활동하면서 한층 더 인기를 모은다. 이른바 서민형 정치가의 대명사가 요코야마다.

그 덕분에 2기 선거에 나서 간단히 당선된다. 그러나 그 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전수전 탤런트 정치가의 인생은 한계를 드러낸다. 선거기간 중 벌어진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서 민·형사소송에 직면한다. 특유의 입담으로 거짓말로 일관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성추행 사실을 시인한다. 형이 선고되면서 성추행 탤런트 정치가라는 부끄러운 최후를 맞게 된다.

도쿄(東京)도 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太?)는 긍적적인 의미로 본 탤런트 정치가의 대명사에 해당된다. 한국에서는 우익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지만, 보통 일본인들은 정치가인 동시에 소설가 셀리브리티로서의 이시하라로 기억하고 있다. 아오시마 같은 인물과 질적으로는 다른, 정통파 국민적 작가가 이시하라다.

아오시마는 방송을 이용한 탤런트로서의 작가인데 비해, 이시하라는 문학 그 자체에 주력한 문단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1956년 발표된 <태양의 계절(太陽の季節)>은 이시하라에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패전에 찌든 일본 국민들의 어두운 가슴을 태양이 숨쉬는 바다로 몰아세운 것이 이시하라의 소설 <태양의 계절>이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젊음과 바다를 즐기는 ‘태양족(太陽族)’이 이시하라가 창조해 낸 반세기 전의 신일본인이다.

고도 성장기에 들어서기 직전에 보여준 24세 이시하라의 도전과 용기는 이후 모두의 기억에 남게 된다. 눈에 띄는 수려한 외모는 당시 막 일본 전역에 보급된 텔레비전을 통해 열도 전체에 알려진다. 흑백시대이기는 하지만 일본 최초의 비주얼 작가로 등장한 것이다.

이시하라의 동생으로,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배우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시하라 유지로(石原裕次?)도 이시하라의 지명도 상승에 공헌한다. 이시하라는 36세가 되던 1968년 참의원으로 정치무대에 입성한 이래, 중의원에도 9번 연속 당선된다.

아오시마 추락 이후 도쿄도 지사에 나서면서 이후 4번 연속 줄당선된다. 현역 일본 정치인 가운데 최고의 정치경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작가라는 직업은 이시하라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주목할 흥미로운 부분에 들어간다. 이시하라는 정치가가 된 이후에도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품을 남긴 직업 작가로 분류된다. 동생에 대한 회고록에서부터, 일본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이나 자신의 인생 회고록 같은 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보통 책이 나오면 최하 수십만 권 단위로 팔린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정확히 2001년 9월 12일 아침, 이시하라와 접한 적이 있다. 9·11 동시 테러가 벌어진 바로 다음 날로 장소는 워싱턴 포시즌스 호텔이다.

이시하라는 9·11이 터지기 3일 전 워싱턴을 공식 방문했다. 당시 도쿄도지사이던 이시하라는 20세기말 일본과 미국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책인,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NOと言える日本)>과 관련된 강연을 했다. 미국 정치가, 언론인, 싱크탱크 관계자들이 이시하라의 생각을 듣기 위해 ‘엄청’ 몰려들었다.


이시하라, 문학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고자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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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5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아오시마 유키오. / 2. 유명 소설가 출신인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는 탤런트 정치인의 대명사로 통한다. / 3. 올 7월 도쿄도지사로 선출된 고이케 유리코 전 방위상이 지지자들에게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강연이 끝난 뒤인 9월 12일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동시 테러로 워싱턴 내 국제선 비행 일정이 중단되면서 발이 묶인 것이다. 포시즌스에 들른 것은 이시하라의 참모로 미국에 온 필자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참모의 방에서 얘기를 나누는데 이시하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기 상황이기에 모든 일정이 중단된 채 호텔방에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좋은 시간이다. 밀린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틈만 있으면 메모를 하고 글을 쓴다. 아마 하루에 400자 원고지 10장은 족히 쓸 것이다. 이시하라는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문학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정치계에 들어온 사람이다.”

참모의 얘기를 통해 당시 필자는 탤런트 정치가 이시하라가 어떤 의미로 국민에게 어필되는지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정치를 위한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위한 정치가 이시하라의 진짜 얼굴이다.

정치의 부분집합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위한 소재나 주제로서의 정치라는 의미다. 정치에 들어가는 즉시 문학세계와 단절된 채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정치가로서가 아닌, 자신의 문학세계를 한층 더 깊고 넓게 만들려는 의도 아래 정치를 이용한다는 의미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비교이겠지만, 사실 일본 텔레비전의 정치 드라마를 자세히 살펴보면 ‘올인(All in) 정치’ 사고가 일반화된 한국적 상식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게 된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정치인의 밀담 장소에 관한 부분이 필자가 주목하는 본보기다. 한국 정치드라마의 경우 정치인이 만나는 장소는 고정된 몇 군데에 한정된다. 정치인 사무실, 골프장, 룸살롱, 자동차 같은 곳이다.

일본은 어떨까? 사무실, 골프장, 룸살롱, 자동차도 있지만, 다른 장소도 많다. 학(鶴)을 기르는 휴양지, 막 개업한 신인 셰프 레스토랑, 대학시절부터 자주 들른 찻집, 가부키(歌舞伎)나 노(能) 같은 이벤트장 근처의 과자점 같은 것이 좋은 본보기다.

이들 장소의 특징은 밀담을 나누는 정치인의 취미생활과 관련됐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취미나 생활의 일부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정치인과 만나 얘기를 나눈다. 일이나 업무로서의 정치도 중요하지만, 정치인 개개인의 관심사에 근거한 다양한 각도의 개성이 일본 정치 드라마의 배경 중 하나다.

대화에 들어가는 과정을 봐도 개개인의 취미에 근거한 공통분모를 기점으로 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이야 권력에 매진하는 정치겠지만, 주변에 늘어선 주연이 넘치면서 권력 주변의 인간 스토리를 한층 다채롭게 흥미롭게 만들어가는 식이다.

눈부신 주인공 한 명과 나머지 전부로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700개가 넘는 캐릭터로 구성된 ‘포켓몬 스타일 분산형 세계관’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포켓몬 캐릭터 속에는 모두를 총괄하는 제1주인공이 없다. 아무리 약해도 자신만의 특화된 부분을 이용해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유일신이 아닌, 다신교에 기초한 공간이 포켓몬의 세계다.

포켓몬 스타일의 탤런트 정치는 국가, 민족을 앞세운 우국지사적 정치와 다르다. 올인 정치가 아니라, 필요할 때 빼먹으면서 활용하고 즐기는 생활형 정치다. 책임과 의무로 가득 찬 무거운 정치가 전부가 아니라, 즐기고 선택하는 일상적 얘기가 중심에 서는 식이다. 한국식 표현을 빌자면 ‘저녁이 있는 삶’, 즉 재미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정치다.

국가와 민족도 중요하지만, 흥미롭고 즐기고 싶은 대상으로서의 정치다. 탤런트 정치 대국 일본의 기준에서 보면, ‘국가 민족과 같은 대의 명분론자=퇴출이나 명퇴 대상’에 불과하다. 혈서와 구호도 좋지만, 보통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생활형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와 ‘포켓몬 스타일 분산형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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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왼쪽)도 정계 입문 전 ‘청춘콘서트’ 등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2. 스타 방송인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제1 야당의 원내대표를 지내는 등 중진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 3. 경찰대 교수 출신의 표창원 더민주 의원(가운데)은 방송활동을 통해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재임 중 갈라파고스나 유럽 여행을 떠나는 이시하라류의 정치는 그 같은 포켓몬 스타일 정치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치 일변도가 아닌, 분산형 세계관에 따른 여유로움이 탤런트 정치가 이시하라의 행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일본 내에서 이시하라를 공사혼돈(公私混沌) 포퓰러 무책임 정치가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이시하라의 ‘일탈된’ 행동이나 언어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일상적 정치가의 이미지에 벗어난 캐릭터인 동시에, 애초부터 선택한 인물도 정치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탤런트 정치의 대국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탤런트 정치가를 둘러싼 역사와 규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일본에서 탤런트 정치 스타일의 정치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2년이다. 메이지(明治)헌법이라 불리는 근대적 입법인 제국헌법이 나타난 지 불과 3년 만으로, 당시 대중작가 도카이 산시(東海散士)라는 인물이 8회 연속 입법의원으로 당선된다.

도카이의 전문 분야는 정치소설로, 당시 아시아 전체를 범주로 한 정치상황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주목할 부분은 조선에 관한 부분으로, 김옥균과 자신에 관한 픽션에 근거한 정치상황도 소설에 등장한다.

대중적 취향에 맞춘 작가, 그것도 정치소설 전문가가 제1호 탤런트 정치가로 탄생했다는 것은 일본 정치문화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에 해당된다. 전후(戰後) 탤런트 정치가로 1호로 나타난 인물은 엔카(演歌) 가수인 이시다 마츠이치(石田一松)다. 대학출신으로 전후 일본인의 참담한 심리를 애절한 멜로디에 실어 중의원에 당선된다.

탤런트 정치가라는 말이 일본 미디어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62년이다. 인기 대담프로 출연자로 활동한 후지와라 아키(藤原あき)가 주인공이다. 문호(文豪)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의 친척으로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탤런트가 참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

후지와라 이전까지는 탤런트 정치가라 해도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후지와라는 정치와 무관한 인물로 정치무대에 오른 ‘순수한‘ 탤런트 정치가 제1호다. 이후 비례대표제와 더불어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탤런트가 속속 국회로 진출한다.

여야간의 정강·정책이 모호해진 상황에서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는 일본 특유의 정치체제는 탤런트 정치를 부추기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정치·행정에 무지하다 해도 관료들이 받쳐주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된다.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큰 변화를 창출하지는 못해도 관료를 기반으로 한 안정된 구도가 이뤄진다.

규모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탤런트 정치가 양산의 강국이 바로 일본이다. 탤런트 정치가 수가 엄청나다. 시기별로 다르지만, 중의원·참의원 선거를 통틀어 보통 한 번 선거에 10여 명 이상이 당선된다.

지난 7월에 끝난 참의원 선거의 경우 11명의 탤런트 정치가가 탄생했다. 현역 탤런트 정치가는 중의원·참의원을 합쳐 전부 40여 명이다. 중앙에서 활동하는 탤런트만이 아닌, 지방 방송국에 알려진 인물들도 작은 군소도시 정치무대에 진출한다.

각자의 배경을 보면 다채롭다. 연기자·가수·코미디언은 기본이고 운동선수, 만화가, TV해설위원, 패션전문가 등도 진출한다. 7월 참의원 선거에 당선된 탤런트 정치가의 경우, 여배우, 야구선수, 배구선수, 음악가, 기자, 아나운서, TV앵커 등으로 이뤄져 있다. 모두 출마 이전부터 텔레비전을 통해 모두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자 아나운서라는 직업이다. 탤런트 정치가의 대명사로 여자 아나운서에 준하는 블루칩은 없다. 배우나 운동선수도 중요하지만, 여자 아나운서의 경우 후보자로 나가는 즉시 당선이다. 여자 아나운서와 스튜어디스는 보통 일본인들이 받아들이는, 똑똑하고도 미인이며 친절한 여성의 대명사에 해당된다.

사실 여자 아나운서와 스튜어디스는 경쟁률이 가장 높은 여성 직업 중 하나다. 한국 방송계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머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기자나 앵커보다도, 적당한 머리와 화분 속의 꽃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자 아나운서가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다.

여야 할 것 없이 선거 때 상종가에 올라가는 신인이 바로 여성 아나운서다. 최근 도쿄도 지사에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는 여성 아나운서 군단의 대표주자다. 고이케는 야당인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총리가 유력시되는 인물로, 텔레비전 경제 프로그램의 여자 아나운서로 일한 경력을 통해 1992년 정계 입문했다.

탤런트 정치가의 대규모 탄생은 가까운 시일 내에 직면하게 될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미 곳곳에서 탤런트 정치가가 나타나고 있지만, 현재는 한순간 활용될 액세서리에 머무르고 있다. 실질적인 파워나 국민에 대한 영향력은 아직 미약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한국 정치의 중심세력이 낡고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4050세대 운동권 출신의 세계관은 ‘우물 안 개구리’ 그 자체다. 이들은 결코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30년 전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분산·개방·칼라형 포켓몬 세대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한국정치에 드리워진 청년들의 무관심·냉소·자학은 그 같은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탤런트 정치인의 영입은 정치상황을 타파하는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

트럼프가 그러하듯, 탤런트 정치가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표현이나 행동은 어색하겠지만, 우물 안 개구리보다는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탤런트 정치가 한층 더 우위에 설 수 있다.


탤런트 정치는 독과 약의 중간에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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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바둑계의 산증인인 조훈현 기사(왼쪽 둘째)도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20대 국회에 진출했다.

탤런트 정치는 독과 약의 중간에 서 있다. 인기를 통해 한순간 정치무대에 오를 수 있겠지만, 나라 전체를 엉뚱한 곳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독보다 약이 될 수 있는 것이 탤런트 정치라 믿는다. 고리타분한 정치가 아닌 탤런트 정치가 원래의 영역을 얼마나 특화할지 여부가 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이다.

구호와 혈서에 젖은 ‘올인’ 정치가 아니라, 탤런트 자신의 일이나 관심영역을 정치에 실어 국민과 공유하는 식이다. 정치무대에 오르는 순간 모두 똑같아지는 붕어빵 캐릭터가 아닌, 자신의 전공을 특화해서 정치를 통해 확산시키는 세계관이다.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해결하던 시대는 끝났다. 정치가 모자라는 부분을 다른 영역을 통해 얼마나 보충할지 여부가 정치가의 주된 역할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탤런트 정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시대의 주역은 비주얼이다.

모바일 천국 한국은 비주얼 정치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일본 화는 한국 경제만이 아닌, 정치에도 밀려들고 있다. 탤런트 정치는 이미 불고 있고 한층 더 강해질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무능과 성추행으로 끝날지, 희망과 비전이 채워진 저녁이 있는 삶으로서의 정치를 보여줄지 여부는 전적으로 유권자에게 달렸다.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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