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열씨 아내 "윤씨 만난 뒤 모든 걸 잃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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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업가 윤창렬을 만든 일등공신’으로 알려졌던 윤씨의 아내는 3000여명의 분양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한 남자의 잘못된 욕망의 희생양이었다.

동대문 복합쇼핑몰 굿모닝 시티 분양 비리 의혹 사건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은 엄청난 것이었다. 목수 출신의 한 사업가가 일궈낸 성공신화는 ‘굿모닝게이트’라는 정·관계 뇌물 스캔들로 얼룩졌고, 그 핵심 인물인 윤창렬씨 역시 재기 불능의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검찰 안팎에서는 ‘이미 윤씨의 인생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겠느냐’며 그의 재기 가능성을 희박하게 내다봤다. 부인 이모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온갖 비리를 저지른 파렴치범으로 내몰린 남편을 지켜보는 부인의 심경을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부인 이명옥씨(48·가명)와의 인터뷰는 ‘남편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기자의 당초 예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 사람 얘기는 제게 묻지 말아주세요. 우린 이미 10여년 째 따로 살고 있고,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으니까요”
남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녀에게 여러 차례 만나기를 권유해봤지만 시골에 가서 당분간 쉴 생각이라며 30여 분 안팎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서만 가슴속 응어리진 사연을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그 사람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혈압이 오르고 심장이 마구 뛰어요. 요즘 TV나 신문에서 그 사람 얘기가 계속 나오는데 그 이름, 그 얼굴조차 듣기도 보기도 싫어요. 기자도 제게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전화한 것 같은데 그 사람과의 인연은 이미 10여 년 전에 끝났어요. 남은 건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원망 뿐이에요. 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놓은 사람이니까요.”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미 윤창렬씨와는 10여 년 넘게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이혼은 하지 않은 상태. 10여년 간 별거를 하는 법적으로만 부부 사이였던 셈이다.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혼을 해주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지금껏 별거생활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린 남이나 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도 이미 처자식을 버렸구요. 여러 번 이혼을 요구했지만 바쁘다는 이유 등을 들어 안 해주더라구요. ”

남대문에서 블라우스 도매상 하던 아내, 윤씨 만난 뒤 모든 걸 잃었다

이씨가 윤씨를 만난 건 지난 1987년 5월. 윤씨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고 한다. 당시 이씨는 일찍부터 남대문 시장에서 블라우스 도매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윤씨와 결혼했고, 윤씨는 그런 아내를 도와 판로개척을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유통 마인드를 익힐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굿모닝 시티 성공 분양과 한양건설 인수 등으로 각종 언론의 ‘뉴스메이커’가 됐던 윤씨. 그는 당시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내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사업가로 나서게 된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사법고시를 포기한 후 외롭게 고투하며 살아온 내게 아내는 인생과 사업의 동반자가 돼주었다. 아내를 도와 판로개척을 위해 전국을 돌면서 유통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상가와 유통에 대한 안목은 바로 그때 터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씨의 성공신화를 그려낸 언론기사에서 그의 아내 이씨는 ‘성공한 사업가 윤창렬을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씨는 ‘윤씨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분노했다.

“저도 한때는 남대문에서 블라우스 도매상을 하며 잘나갔던 때가 있었어요.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어도 지금쯤 돈 걱정 없이 잘살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면서부터 많은 것을 잃게 됐어요. 가게도 잃게 됐고, 심지어는 제가 대신 구치소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가게를 잃고 나서부터는 동생네 가게 일을 봐주기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고 있어요.”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게 되면 쓰러져버릴 것 같다’며 이내 흐느낌으로 힘들었던 지난 삶들을 대신했다. ‘구치소라뇨?’라고 묻는 기자에게 그녀는 ‘그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구치소까지 가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회피했다. 윤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도 이씨의 몫이었다. 그 아이가 다섯 살 때 윤씨와 별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벌써 열여섯. 여느 어머니처럼 그녀 역시 아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눈물 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제일 불쌍하죠. 우리 아이는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랐어요. 어릴 땐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기도 했나봐요. 그런 내용이 담긴 아이의 일기장을 보며 많이 울었어요. ”

윤씨는 굿모닝 시티 분양 성공으로 수천억대의 자금을 거머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처자식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육비요? 생활비조차 주지 않았어요. 전에 진 빚도 제가 갚고 있어요. 그 빚이 얼만데…. 제가 벌어서 아이를 기르고 있죠. 행여라도 전화를 하면 바쁘다는 이유로 상대해주지 않았죠. 그래도 그 사람이 창피해할까봐 사무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나중에 성공하고 정착하게 되면 아이는 돌봐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깐요.”

이씨의 말대로라면 윤씨는 정말 ‘무심한 가장’이었다. 수천억대의 돈을 거머쥐었으면서도 처자식을 ‘나 몰라라’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부인 이씨의 원망 섞인 흐느낌 속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라 불리면서도 지난 10년간 자녀 양육비 한푼 안 줘

그와의 결혼생활은 아주 짧았다고 한다. 함께 지낸 세월은 겨우 일년여에 불과했단다. 그 일년여간의 결혼생활에서 지금의 아이를 갖게 됐다고. 윤씨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물었다.

“그 사람은 뜬구름을 잡고 다니는 사람이었어요. 여기저기 일만 저질러놓고. 사기도 여러 번 당했어요. 그래서 제 가게도 그렇게 됐고.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다니게 된 거죠. 어찌 보면 그 사람도 참 불쌍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남대문 일대 알 만한 상인들은 다 알 거예요.”

인터뷰 내내 분노로 가득 찼던 그녀가 처음으로 윤씨를 동정했다. 이씨 말대로 윤씨는 전북 익산의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윤씨의 부모님은 익산 소재 극장 옆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실장사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일찍이 학업을 포기했고, 목수일을 배우며 서서히 사회로 진출해나갔다. 그리고 굿모닝 시티 사업은 단숨에 그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놨다.

윤씨 뒤에는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선 가난한 목수의 성공 신화’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수식어도 이씨의 말처럼 ‘뜬구름’같은 것이 돼버렸다. 부인 이씨는 ‘벌 받은 거’라며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우리 친정 식구들조차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그 사람 일 터지고 나서 친정 식구들도 ‘그럴 줄 알았다’며 욕을 하더군요. 당연하죠. 죄값을 치르는 거겠죠. 이제 정말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고 싶네요. 마음의 안정이 안돼서 어디 시골에라도 가서 쉬고 싶어요. 이제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너무 힘드니까요.”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이후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봤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궁금했지만 그녀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며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단돈 7억원으로 9800억에 달하는 매머드급 쇼핑몰 분양을 성공시키며 각종 매스컴을 장식했던 윤창렬씨. 그러나 그는 결국 3000여 명이 넘는 피해자만을 남기고 좌초하고 말았다. 온갖 비리의 온상이 돼버린 굿모닝 시티는 ‘굿모닝게이트’로 까지 비화되며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으로 일파만파 확산돼가고 있다.

기획_안용호 기자 취재_김은숙(일요서울 기자) 사진_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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