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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바다 없는 스위스의 해운대국 비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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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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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지난주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가정주부로 집에만 있다가 나와서 전문성이 부족했다”고 고해성사를 했다. 바로 그 시각, 부산에서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에도 부산항의 한진해운 직원들은 단 한 명도 퇴직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은 ‘우리 같은 뱃사람은 침몰하는 배에선 끝까지 이탈하지 않도록 길러졌다’고 말했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번 물류대란에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쪽은 한진해운 직원들과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뿐이다. 법원 파산부는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정도 소요되던 회생절차 개시를 이례적으로 법정관리 신청 하루 만에 결정했다. 법원은 또 채권단인 KDB산업은행 등에 1700억원으로 추산되는 물류대란 해소비용을 DIP금융(회생절차 기업에 대한 대출)으로 신속하게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반면 유일호 경제부총리와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바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최대주주가 풀 문제”라며 아주 느긋하다. 산업은행도 “회수 불가능한 한진해운에 추가 대출은 곤란하다”고 버틴다.

 한진해운 선박이야 채권 회수 대상이지만 그 배에 실려 있는 화물은 또 다른 문제다. 지금 바다를 떠도는 한진해운 선박에는 15조원의 화물이 40여만 개의 컨테이너에 실려 있다. 가장 급한 것은 식품이다. 유통기한을 넘기면 폐기 처분해야 한다. 삼성전자 등의 부품도 적지 않다.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현지 공장 조립라인 전체를 멈춰야 한다. 그 화물의 90%는 외국인이 주인이다. 1700억원을 아끼려다 애꿎은 화주들이 수조원의 피해를 뒤집어쓰게 됐다. 오죽하면 삼성전자가 “돈은 우리가 댈 테니 화물부터 부려 달라”고 애걸하고 16대의 값비싼 전세기까지 투입하려 하겠는가. 이제 화물을 약속대로 수송해 주는 것은 한진해운을 넘어 대한민국이 책임져야 할 비상사태다.

 지금 세계 1위 해운업체는 덴마크의 머스크다. 머스크는 내부에 은행을 둘 만큼 거대 그룹이다. 세계 2위는 의외로 스위스의 MSC다. 스위스는 육지에 둘러싸인 산악국가로 호수만 있을 뿐 바다가 없다. 아폰테 가문이 소유한 MSC는 DNA부터 다국적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창업자가 스위스에 만든 회사다. 선박에다 손자·손녀의 이름을 붙일 만큼 긴 호흡으로 경영한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의 오랜 생존 지혜에다 MSC의 개방성이 화학적 결합한 것이 세계 2위 해운대국에 올라선 비결이다.

 MSC는 단순한 의사결정 구조와 과감한 승부수가 압권이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원화는 폭락했고 한국 조선소들은 외화에 목말라 있었다. MSC는 과감히 한국 조선소에 값싸게 선박들을 발주했다. 머지않아 해운 시황이 회복되자 MSC는 세계 2위로 우뚝 섰다. 2008년부터는 한발 앞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선박 매각, 인원 감축 등으로 과감히 몸집을 줄인 것이다. ‘적과의 동침’도 불사해 세계 1위 머스크와 해운동맹을 맺었다. 요즘 MSC는 기록적인 영업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스위스의 바다 사랑은 아메리카스컵 요트대회를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회는 올림픽·월드컵에 이어 세 번째로 큰 10조원 규모의 시장을 자랑한다. 3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는 미국이 1851년 해양대국 영국을 꺾은 이후 132년 연속 우승했다. 그런데 뜻밖에 2003년부터 바다가 없는 스위스가 연속 2회 우승했다. 스위스의 우승 배경은 간단하다. 그전 대회에서 우승한 뉴질랜드팀의 주력 선수를 몽땅 스카우트하는 등 12개국 다국적 용병들로 세계 최고의 팀을 꾸렸기 때문이다.

 해운업은 발틱운임지수가 2008년 사상 최고치에서 6개월 만에 95%나 폭락할 만큼 리스크가 큰 시장이다. 시랜드·US 라인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들도 순식간에 침몰했다. 바다를 잘 알아도 힘든 산업이다. 스위스에 비해 한국은 바다를 너무 모른다. 과연 세계 5위 해운대국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나마 한진해운·현대상선을 하루라도 빨리 법정관리·국유화한 게 다행이다. 더 미룰수록 혈세만 낭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바다를 모르는 관료와 금융기관 때문에 얼마나 더 해운산업이 망가지고 바다 사나이들의 가슴이 멍들지 안타까울 뿐이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