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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품 실은 한진해운 68척, 23국 44개 항만서 발 묶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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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인 한진해운의 ‘법정관리행(行)’에 따른 ‘물류대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 전 세계로 수출 상품을 실어 나르던 이 회사 선박 중 절반가량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되면서 파장이 수출 기업들에까지 미치고 있다. 정부도 부처 합동으로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등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법정관리가 결정된 지 5일 만이다. 하지만 뚜렷한 해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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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역업체들, 밀린 대금 지급 요구
작업 거부하거나 입·출항 금지시켜
당장 사태 해결에 3000억원 필요
금융당국, 조건부 자금 지원 검토

4일 한진해운에 따르면 이 회사 소속 68개 선박의 발이 묶였다. 한진해운 보유 선박(141척) 중 48.2%다. 입항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대기 중이거나 일부는 압류됐다. 주요 항만에서 한진해운 선박에 대해 입·출항을 금지하거나 하역 관련 업체들이 밀린 대금을 지급하라는 등의 이유로 작업을 거부해서다. 이런 항만이 23개국 44곳에 이른다.

파장이 수출 기업으로 튀고 있다. 한진해운의 배로 수출품을 운송했던 기업은 운송선을 확보하지 못해 직격탄을 맞고 있다.

파장이 커지자 정부는 대응 수위를 높였다.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 주재로 기획재정부·외교부 등 9개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대책을 마련했다. 정부는 해수부에서 운영한 비상대응반을 범부처가 참여하는 ‘관계부처 합동대책 태스크포스(TF)’로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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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한진해운 소속 선박의 묶인 발을 풀어주는 게 시급하다. 정부도 여기에 초점을 뒀다. 한진해운 배가 입항할 수 있도록 해외 항만 상대국 정부 및 터미널과 협의한다. 현재 한진해운은 선박 압류를 막기 위해 43개국 법원에 압류금지명령(Stay Order)을 신청 중인데, 정부는 해당 국가에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해수부는 국적 선사들의 기존 운항 노선 중 일부 기항지(배가 목적지로 가기 전 들르는 항구)를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하지만 이런 대책이 실제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정부도 자신이 없는 눈치다. 해당 국가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수부의 한 관계자는 “국내 항만은 정부가 나서 설득하면 따라오겠지만 해외 항만의 사정은 다르다”고 말했다.

핵심은 ‘돈’이다. 주요국 항만의 하역 거부를 막으려면 한진해운이 해당 업체에 대금을 지급하면 된다. 한진해운이 밀린 항만 이용료와 하역비, 용선료 등은 6000억원이 넘는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당장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이 중 용선료를 제외한 3000억원 정도다. 한진해운이 자금 고갈로 법정관리행을 택한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돈을 마련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결과적으로 부담을 질 수 있는 곳은 채권단과 대주주다.

예상보다 큰 파장에 놀란 금융당국이 먼저 카드를 꺼냈다. 대주주가 먼저 성의를 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추가 자금 지원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물류대란의 1차 책임은 대주주에 있다”며 “대주주가 담보를 제공하거나 부족 자금의 일부를 대는 식의 성의를 보이고 난 후에야 채권은행이 추가 대출 등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채권단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카드라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채권단은 대주주의 ‘자구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진해운에 더는 자금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이 결과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를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단이 어떤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건 어렵다. 결국 한진해운 측에서 어떤 명분을 만들어줘야 채권단이 물류대란 해결용 자금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진해운 관계자는 “(정부나 채권단으로부터) 공식적인 제안을 받은 게 없기 때문에 정해진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양측의 대치가 이어지며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또 시간을 끌수록 피해가 커질 수 있는 만큼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을 하고 있다.

대한해운·STX팬오션 법정관리에 관여했던 김창준 법무법인 세경 대표변호사는 “하역업체가 작업을 재개하려면 무엇보다 정부가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며 “회생절차 개시 이후의 채권(공익채권)에 대해선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하고 그 이전에 생긴 연체채권은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애란·하남현·김민상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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