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의 땅에 세운 묘지 사용권, 대법 이번에도 인정할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5호 10면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강원도 원주시 어느 산 중턱에는 산을 갈아 만든 작은 밭(1만4275㎡)과 그 사이사이 자리 잡은 6기(基)의 분묘가 있다. 얼핏 평화롭게 보이는 이 땅은 2005년부터 10년 넘게 송사에 휘말려 있다. 11년 전 땅을 상속받은 A씨(79·여) 등과 수백 년째 분묘에 제사를 드려 온 원주원씨 도창공파의 후손들이 치열하게 맞붙어 왔기 때문이다. 땅을 입맛대로 처분하고 싶은 A씨와 분묘 수호와 제사가 존재 이유인 종중의 물러설 수 없는 법정 다툼은 벌써 3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 땅은 원래 대대로 원주원씨 도창공파가 관리해 온 ‘집안 땅’이었다. B씨 등 종중 측 인사들은 “최소 고려시대부터 종중이 소유·관리해 왔다”고 주장했다. 6기의 묘지 중 1기는 1733년 세워진 이 집안 시조의 봉분이다. 1977년 ‘부동산소유권 이전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돼 소유권 증빙자료가 미비한 땅의 주인들도 한동안 쉽게 등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B씨 등은 1985년 이 땅에 자기 명의로 소유권 보존등기를 했다. 1987~90년 후손들은 B씨의 증조부를 비롯한 선조들의 묘 5개를 추가로 세웠다.


문제는 2005년 A씨가 땅의 진짜 소유자라고 나서면서 시작됐다. A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인 1915년과 21년에 토지조사사업결과 소유권을 확정(사정?査定)받았으며, 본인이 그 땅을 단독으로 상속받았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1912년부터 전 국토에 관한 전면적 조사를 벌여 소유관계를 확정했다. 지번체계와 행정구역을 편제하고 등기부제도 등 소유권을 공시하는 근대적 토지제도가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A씨는 2005년 춘천지법 원주지원에 종중 구성원들의 소유권 보존등기를 말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종중 측은 “단지 과거에 종원(宗員)이었던 A씨의 할아버지 명의로 땅을 맡겨 놨기 때문에 사정받게 됐을 뿐 실제 소유권은 종중에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2008년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 줬다. 재판부는 “명의 신탁을 입증하려면 토지 사정 이전부터 종중이 땅을 소유했다는 것을 보여 줄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며 “매년 소수의 종원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분묘 인근의 밭을 경작했다는 것만으로는 땅을 배타적으로 점유·관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은 2009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부동산실명제에 반하는 명의 신탁은 쉽게 인정하지 않지만 토지 사정은 개인에게 땅의 소유권을 부여한 최초의 행위로 손쉽게 받아들이는 게 법원의 판결 경향이다.

이후 2011년 A씨는 이 판결을 근거로 B씨 등에게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1·2심 재판부는 “A씨가 땅의 소유자라도 묘지를 옮기게 할 권한은 없다”며 중종 후손들의 손을 들어 줬다. 재판부는 분묘 5기에 대해 “후손들이 설치 이후부터 A씨가 소송을 내기 전까지 20년 이상 묏자리를 점유해 왔다”며 “분묘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인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을 취득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A씨가 상고해 대법원에 올라온 이 사건은 전원합의체에 회부되면서 관습법상 권리로 인정받아 온 분묘기지권의 존폐를 가르게 됐다.


1·2심 재판부가 인용한 분묘기지권은 타인의 토지에 분묘를 조성했더라도 일정 기간 이상 관리·유지했다면 계속해 분묘 주변의 터를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권리다. 민법 조문엔 없지만 대법원은 ‘관습법’이라고 인정해 왔다. 과거 매장 문화가 압도적이던 시절 묘지를 세울 땅이 없는 다수 서민은 다른 사람의 땅에 묘를 쓸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묘를 함부로 철거하거나 손상하는 건 전통적 윤리관을 해치는 일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분묘기지권에 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재점화된 것은 2001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이 시행되면서다. 장사법은 2001년 1월 13일 이후 세워지는 분묘에 대해 분묘 설치기간을 기본 15년으로 규정하고, 3번 기간을 연장하면 최장 60년간 분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또 땅 주인 허락 없이 만든 분묘는 지주가 관할 시장 등의 허가를 받아 개장(改葬)할 수 있게 했다. 이후 장사법은 묘지의 기본 설치기간을 30년으로 정하고 1회에 한해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개정됐다.


매장기간과 후손들의 토지사용권을 제한한 장사법이 정착되면서 법조계와 학계에선 대대로 상속돼 영원히 인정되는 분묘기지권이 “형평에 맞지 않는 권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장사법이 생긴 이후에도 법원은 분묘기지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계속 쏟아냈다. 숭실대 오시영 국제법무학과 교수는 “장사법 시행 후 분묘기지권은 효력이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장사법 시행 이전에 설치된 분묘도 시행일을 기준으로 설치기간을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민호 법무법인 바로법률 번호사는 “대법원이 기존 관행에 대한 국민들의 법적 확신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관습법 형태로 인정될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장묘 문화의 급변 등 사회적 여건 변화를 어떻게 볼지가 분묘기지권의 존립을 가를 중요한 쟁점으로 꼽힌다. 화장 후 납골당에 안장하는 방식이 대세로 정착하면서 분묘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화장률은 2005년 51.6%에서 2014년 79.2%로 급증했다. 박태호 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 “유교사상이 쇠퇴하면서 화장이나 수목장을 선호하는 이가 늘고 있다”며 “분묘기지권은 묘지와 제사에 대한 현대적 인식을 고려하지 않은 해묵은 제도”라고 말했다. “조상 숭배라는 윤리적 가치관을 수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성균관 관계자는 “조상의 시신뿐 아니라 영혼이 함께 깃든 묘지를 함부로 파손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분묘기지권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바뀌면 전국 약 1500만 기의 분묘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22일 공개변론을 열고 네이버와 유튜브 등에서 생중계를 한다. 대법원 관계자는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사안인 만큼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법적 근거와 기준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