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한반도, 외세 각축장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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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로간 서클. 13가(街)와 로드 아일랜드 도로가 만나는 원형의 교차로다. 거기에 1백년 전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 남아 있다. 백악관에서 차로 북동쪽 10분 거리.'대조선 주(駐)미국 화성돈(華盛頓.워싱턴)공사관'으로 불렸던 곳.

헐렸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한세기 이상 잊었던 우리의 역사. 빅토리아 양식의 적갈색 3층. 재개발이 안 된 덕에 한세기 전 빛바랜 사진 속 공관의 겉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감회가 깊을 수밖에 없다.

공관은 1891년 당시 거금인 2만5천달러에 샀다. 가난한 조선의 엄청난 투자였다. 중국(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러나 청은 종주국의 거드름을 떨며 방해했다.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도와줬다. 청은 영약삼단(另約三端)이란 조건으로 승인했다. 워싱턴에서 조선 외교관은 청의 말석에 앉고 국무부 방문 때 청의 안내, 외교 교섭은 청과 사전 협의하라는 조건이다. 공관은 굴욕 속에 이룬 외교적 성취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때 그 건물은 단돈 5달러에 일본으로 넘어간다.

자주 외교의 열정, 약소국의 좌절이 교차하는 구한말 공관. 로간 서클을 산책하면서 나는 역사의 반복이란 말을 떠올렸다. 노무현 시대의 한반도는 그때처럼 열강의 비극적인 각축장이 돼 가고 있다. 우리의 국력이 엄청나게 커지고 외세 순위는 달라졌지만 기본 형태는 비슷하다.

중국 외교부의 다이빙궈(戴秉國)부부장이 최근 워싱턴을 다녀갔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워싱턴에 온 그는 북핵의 해결사를 자처했다. 그의 활약으로 '선(先)3자(북.미.중)→후(後)5자(한.일 추가)회담'이란 틀이 짜이고 있다.

단계적 다자회담은 새로운 돌파구다. 회담의 겉모양은 화려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고단한 과정이다. 근본적으로 한반도 주변 강대국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외세 의존이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남의 힘으로 푸는 방식이다.

중국은 그런 정세를 활용하고 있다. 북핵은 중국 외교의 결정적 호재다. 중국은 1백년 전 잃었던 한반도 쪽 영향력을 되찾으려 한다. 한.미 동맹은 헝클어졌다. 한국 정부는 대통령부터 나서 북한을 설득해 달라고 중국에 매달리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다이빙궈의 중재외교는 그것을 상징한다. 국제사회에 공짜는 없다. 한반도에서 중국의 발언권은 커졌고, 우리는 눈치를 봐야 한다.

일본이 그 흐름을 놓칠 리 없다. 일본은 북핵 위협을 이유로 군사대국으로 나간다. 북한의 핵 협박을 들어 한반도 침략의 죄 의식까지 떨쳐버리려 한다.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의 중심으로 밀어주고 있다. 북한 편을 들어온 한국 정부가 골치아파서다. 이제 한국은 군사강국 일본을 어떻게 상대할까. 그동안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을 견제했는데 그나마 힘들게 돼버렸다.

어째서 이런 한심한 꼴이 되었는가. 북핵 문제 당사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포기해버린 뼈아픈 대가다. 정권의 무능, 리더십의 스케일 부족, 뒤틀린 역사관, 정권 내 친북.반미 분위기가 얽힌 탓이다. 김대중 정권 이래 민족과 자주를 내세운 대북 정책. 그러나 거꾸로 외세 개입이란 가장 반민족적, 외세 의존이란 반자주적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이제라도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다자회담이란 우회적 수단에만 기대선 안된다. 김정일 정권에게 핵을 포기하라고 다부지게 말해야 한다. 핵무기를 없애면 같은 민족으로서 힘껏 경제를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북한에 경제파탄이 오고 우리도 군사력 증강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 양자택일을 요구해야 한다. 盧대통령에게 그런 용기와 지혜가 있을까.

(워싱턴에서) 박보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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