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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금리의 저주가 덮쳐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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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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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미국 연준(Fed)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재닛 옐런 의장은 26일 “고용과 경제전망이 개선돼 기준 금리를 올릴 여건이 강화됐다”고 밝혔다. 정치적 오해를 피해 미 대선(11월 8일) 전인 9월에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2월 9년 만에 기준금리를 올린 미 연준은 줄곧 금리인상을 자제했다. 브렉시트와 중국의 경기 둔화에 겁을 먹고 참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금리를 올려야 할 이유들이 차고 넘친다. 미국의 6월 실업률은 완전고용 수준인 4.7%였고, 평균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2.6%나 올랐다. 주택가격은 5.2% 상승했고 미 주가도 사상 최고 수준이다. 소비자물가만 제자리걸음일 뿐 7년간의 제로금리가 온 사방에 거품을 일으키고 있다.

금리가 수요·공급만으로 결정된다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금리는 매우 정치적 사안이다. 미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감세→소비 증가→경제 성장의 신자유주의식 소비주도형 성장을 내세운다. 레이건 시절에는 초고금리까지 불사했다. 이에 비해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금리인하→투자 증가→고용 확대를 고집한다. 일자리가 늘고 임금이 올라야 자신들의 표밭인 저소득층과 노동자의 소득불균형이 완화된다고 믿는다. 예일대 제임스 토빈 교수의 제자인 앨런 등이 신봉하는 ‘예일 패러다임’이다.

미 민주당은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로 재미를 보았다. 금융시스템 붕괴와 마이너스 성장을 막고 실업률도 끌어내렸다. 하지만 극약처방에 따른 사회적 불만도 대단했다. 양극화 심화로 도널드 트럼프나 버니 샌더스와 같은 양극단 후보가 대선에서 열풍을 일으켰다. 극단적 금융완화가 좌우 양쪽에서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트럼프는 대놓고 “연준이 힐러리 당선을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며 비난한다. 연준을 신뢰한다는 미 국민도 38%에 불과해 20년 전(70%대)의 절반 수준이다. ‘연준에 질렸다(Fed Up)’ ‘연준을 끝내라(End the Fed)’는 비판을 받을 만큼 제로금리의 정치적 기반이 좁아져 버렸다.

초저금리의 저주는 세계적 현상이다. 유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는 경기는 못 살리고 비생산적인 부동산 거품만 키웠다. 4년 전 최초로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비롯해 노르웨이 오슬로, 스웨덴 스톡홀름의 집값 상승률은 연간 11~12%까지 뜀박질했다. 투자가 늘기는커녕 저축률만 기형적으로 치솟는 것도 초저금리의 역설이다. 고령화 시대에 이자소득과 연금소득이 쪼그라들면서 가계들이 더 불안해진 노후에 대비해 기를 쓰고 저축하기 때문이다. 저금리가 소비 감소와 과잉저축을 야기하는 개미지옥이 된 것이다.

저금리 딜레마에 가장 당황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이머징 마켓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안전자산인 엔화로 몰려 엔화 강세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 금리인상 이후 엔화는 달러당 122엔에서 101엔의 초강세로 돌변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느라 일본은 마이너스 금리까지 동원했으나 소용 없었다. 수출과 증시 대신 엉뚱하게 부동산만 자극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추가로 금리를 올리면 아베노믹스는 붕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더 이상 저금리가 세계를 구원하긴 어렵다. 이미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인 국제결제은행(BIS)이 “제로 금리가 제 발등을 찍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부동산 거품을 막는 선제적 조치를 취하라”며 마이너스 금리의 폐기를 권고했다. 한국은 다행히 심각한 거품 붕괴나 엄청난 원화 강세를 경험하지 않았다. 제조업이 나름대로 버텨주고, 기준금리(1.75%)도 제로금리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 가계대출은 위험한 뇌관이다. 미국의 무자비한 금리인상에 버텨낼지 의문이다. 세계 경제위기는 항상 부채위기에서 비롯됐으며, 방아쇠는 언제나 미국의 금리인상이 당겼다. 미국은 1977, 87, 94, 2004년에 기준금리를 확 끌어올렸다. 이런 10년 주기설에 따르면 언제 금리 급등의 쓰나미가 밀려올지 모른다. 부디 미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해 무자비한 금리인상은 자제하길 기도할 뿐이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