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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악장의 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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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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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작곡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빠른 악장만으로는 음악이 안 된다. 느린 악장도 있어야 한다.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곡은 예외 없이 느린 부분을 그 안에 둔다. 교향곡이나 춤조곡 같은 서양음악 형식에서도 그렇고 산조나 줄풍류 같은 우리 전통음악의 경우에서도 그렇다.

음악은 느리고 빠른 부분이 반복되면서 흥을 돋운다
사람도 쉴 때 쉬지 않으면 빠름의 시기에 힘들어진다

서양에서 여러 악장으로 한 곡을 만드는 관습은 기악곡, 특히 춤곡과 관련이 깊다. 느린 춤곡과 빠른 춤곡을 쌍으로 만드는 것이다. 운동을 할 때 빠른 동작부터 하지 않고 천천히 시작해 점점 빨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기악곡의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느림-빠름-느림-빠름과 빠름-느림-빠름의 배열이 정형화되었다. 음악 애호가들에게 익숙한, 첫 악장이 빠른 4악장 혹은 3악장 체제는 고전주의 미학이 확립되는 18세기 후반, 즉 하이든과 모차르트 시대에 확립된다.

이때의 변화는 단순히 빠르기 배열을 바꾸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 시대의 미학이 반영된 결과였다. 인간의 의지와 이성이 순수한 기악음악에 투영되어 나타난 절대음악의 등장이다. 그동안 큰 의미 없이 느슨하게 병렬되어 있던 악장들은 마치 피라미드처럼 단단하고도 논리적으로 결속된다. 첫 악장은 다음 부분을 위해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부분이 아니라 얘기의 주제를 제시하는 주된 악장이 된다. 그렇게 구성된 곡은 그 분명한 존재감과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살아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우리로 하여금 ‘주피터’니 ‘비창’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한다.

느린 악장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느린 악장은 이제 준비를 위한 악장이 아니다. 그것은 빠른 악장의 다음에 나오는 휴식과 반성과 명상의 악장이다. 1악장이 논리와 주장을 펼친다면 2악장은 그 논리와 주장을 반추한다. 1악장이 음악을 건축물처럼 쌓아 형식을 통해 음악을 보여 준다고 한다면 느린 악장은 서정적인 선율로 감정적 소통을 이루는 악장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악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린 악장에서 종종 나타나는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게, 노래하듯이)’는 그런 성격을 잘 말해 주는 표현이다. 느린 악장은 그 악곡의 주제를 ‘1악장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의 1악장을 힘있고 장쾌한 음악으로 만든 다음 2악장을 매우 느린 ‘장송행진곡’으로 한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그는 아마 영웅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우리 전통음악은 거의 예외 없이 느리게 시작해 차츰 빨라진다. 만(慢)-중(中)-삭(數)이라는 말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영산회상의 여러 음악과 산조 등에서 그렇다. 우리 음악에서 느린 부분은 처음에 올 뿐만 아니라 비중도 높다. 애끊는 듯한 표현, 대담한 길바꿈, 감칠맛 나는 기교, 심지어 능청스러움과 웃음이 대부분 이 느린 악장에서 선보인다. 당연히 제일 어려운 부분이고 연주자의 솜씨가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청중들의 추임새가 가장 많이 필요하고 또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연주 시간도 가장 길다. 산조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를 기본으로 두세 장단을 더하는 구성인데 연주자에 따라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진양조에 할애하기도 한다. 그동안 서서히 흥을 돋우고 좌중의 호흡과 열기를 끌어들여 그 힘으로 다음 장단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종종 “느린 장단을 충분히 연주하고 빠른 장단으로 넘어가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이 만들었으니 음악이 사람을 닮은 것은 당연하다. 느림-빠름의 변화도 그렇다. 사람이 느렸다 빨랐다 하니 음악도 그렇다. 아이들 배움의 성장 그래프도 일직선이 아니라 계단형으로, 빠른 시기와 정체하는 시기가 반복된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사회도 그렇지 않겠는가? 어떻게 빠르게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정체가 문제가 아니다.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반성과 명상, 사태를 다르게 보기, 같이 소통하기, 소통해서 흥을 돋우기, 그 흥으로 다음 시대를 위한 힘을 얻기 등등….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 넘어가면 다음에 오는 빠름의 시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