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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태영호, 작년 에릭 클랩턴 런던 공연 보러 온 김정철 수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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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국 북한 대사관 태영호 공사의 탈북을 보도한 BBC 화면(사진 오른쪽이 태영호). [중앙포토, BBC 캡처]

고위급 베테랑 외교관과 ‘항일 빨치산’ 가족의 일원까지 탈북하는 등 북한 엘리트층의 동요가 커지고 있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55) 공사의 가족은 북한에서 손꼽히는 특권층이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태 공사는 ‘성분’이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고등중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건너가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5년제 평양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배치됐다. 김정일의 전담통역 후보인 덴마크어 1호 양성통역으로 선발돼 덴마크 유학 길에도 올랐다.

역대 최고위급 귀순 외교관
유럽서 체제 대변한 김정은의 입
유튜브에 강연 동영상도 많아
부인은 부총참모장 오금철 집안
김일성 3대 충성한 금수저 가문
BBC “평양 소환 직전 망명 결정”
에번스 기자 “그를 마지막 봤을 땐
런던 식당서 커리 먹고 있었다”

지난 2001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한과 유럽연합(EU)의 인권대화 때는 북한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면서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덴마크·스웨덴에서 근무하다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 파견됐다. 2015년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동행한 적도 있다고 한다.

태 공사의 부인 오혜선(50)은 빨치산 가문에 해당한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인 오백룡(사망) 전 노동당 군사부장과 오백룡의 아들 오금철(69) 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이 오씨와 혈연 관계라고 대북 소식통이 전했다. 오씨 일가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모두 충성해 온 뿌리 깊은 ‘금수저’ 계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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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형 김정철(사진 왼쪽)이 가수 에릭 클랩턴의 런던 공연장을 찾았을 때 수행했다. [중앙포토, BBC 캡처]

태 공사는 주영 북한 대사관에서 현학봉 대사에 이어 서열 2위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여 왔다. 동영상 전문 사이트 유튜브에는 그의 역할을 알 수 있게 하는 영상들이 실려 있다. 지난 2014년 11월 런던의 한 서점에서 한 20분짜리 태영호의 강연 동영상에서 그는 북한 체제 선전에 열심이었다.

태 공사는 강연에서 “대북제재는 미국 주도 제국주의의 압살책”이라며 “영국 등지의 양심세력이 이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무상교육·무상주거·무상의료가 제공되고 있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나오자 그는 표정이 굳어지며 “서방 언론의 왜곡 탓에 북한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2013년 12월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의 숙청·처형 사건도 언급했다. 태 공사는 “조카(김정은)가 삼촌(장성택)을 죽여 개 먹이로 줬다는 것은 모두 꾸며진 이야기”라며 “리더십(지도자)이 바뀌면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바뀌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튜브에서 그의 영문 이름(Thae yong ho)을 검색하면 다른 강연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름과 얼굴, 강연 내용이 인터넷에 생생하게 올라 있다는 것은 그가 외교관으로서 북한 체제를 대변하는 ‘홍보맨’ 역할을 활발하게 해 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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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소식을 가장 먼저 보도한 중앙일보 8월 16일자 지면. [중앙포토, BBC 캡처]

이 과정에서 타국 외교관이나 영국 정부 관계자, 외신기자들과도 교류해 왔다. 영국 주재 북한 외교관이 탈북·망명했다는 본지의 최초 보도(8월 16일자 6면) 이후 영국 BBC는 태 공사가 자취를 감춘 사실을 파악해 16일(현지시간) 망명사실을 보도했다.

태 공사와 친분을 맺어 온 BBC의 스티브 에번스 기자는 ‘내 친구 탈북자’란 글을 통해 “태영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런던 서부 액턴의 인도 식당에서 커리를 먹고 있었다”며 “런던의 한 인도 식당에서 만났을 때 이번 여름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태영호가 말했다”고 전했다. BBC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평양 소환 직전 망명을 결행한 셈이다. BBC와 현지 언론인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한때 골프에 열광하다가 아내(오혜선)가 불평하자 골프 대신 테니스를 즐겼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과 미국, 일본 등과 함께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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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소식통은 “최근 영국의 대북제재 압박이 강화되면서 평양으로부터 대응책을 마련하라는 압박을 받아 오다 탈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태 공사 일가는 당초 미국 등 해외 국가로의 망명을 고려했으나 최종결심 단계에서 한국행을 굳혔다고 한다. 정부는 태 공사의 망명을 계기로 비슷한 급의 엘리트 탈북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태 공사의 망명 사실을 공식 브리핑을 통해 발표한 것도 북한 엘리트들의 탈출 결심에 자극제를 주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서재준 기자 suh.jaej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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