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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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리비아의「혁명 지도자」「카다리」는 78년 리비아가 최초의「자마히리야」가 됐다고 선언했다. 정부가 없는 나라, 곧「인민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스스로 국가원수라는 공식직위에서 물러나「혁명 지도자」란 명칭만 썼다. 물론 그의 절대권이 변화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실제 그가 집권한 혁명은 69년에 있었다. 그는 27세의 청년장교로서 부패하고 무력한「이드리스」왕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는 일찍이 런던의 한 도박장에서 엄청난 돈을 쌓아 놓고 노름으로 탕진하는 리비아왕족을 보고『저것이 도대체 누구의 돈인가』하며 쿠데타를 결심했다는 말도 있다.
그의 무혈 쿠데타에 대해「카다피」자신이『일본의 명치유신을 참고했다』는 보도도 있다.
그의 혁명이 미국의 암암리의 지원을 받아 성공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영국의 우유회사들을 몰아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우유 국유화와 영·미군기지의 철폐를 선언한 것이 미국과 등을 돌린 원인이 되었다.
당시「카다피」는 아랍의 자랑이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해 위축되어 있던 아랍인들에게 그는 아랍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고 있었다.
그자신도 통일아랍을 위해 노력하다 희생된「낫세르」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유에서 얻은 돈으로「카다피」는 한때 리비아를 복지국가로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석유 수입은 연간 20억 달러였고 70년의 1인당 GNP는 1천 달러에 이르렀다. 외환 보유고도 무려 29억 달러나 됐다.
이슬람교와 베두인의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그의 정치철학은『그린 북(녹색의 책)』에 담겨 있다.
거기서 그는 기존의 모든 정치제도는 비민주적이고 파당 적이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지배계층만을 위한 것이며 공산주의는 개인을 압살한다고도 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제국주의자라는 규정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기 때문에 소련과 가까워 갔다.
1백20만 달러 어치의 무기와 기계도 소련에서 사들였다.
반면 미국은「범 이슬람대국」의 실현을 막는 궁극의 적이 되고 있다.
하지만「카다피」는『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좋아하고「워싱턴」과「링컨」을 존경한다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죽음을 노린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결코 쉽게 삭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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