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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의 ‘고유영역’ 사후세계 … 미루고, 피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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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에서는 천국·지옥, 힌두교·불교에서는 윤회·해탈 중시… 죽음이 멀리 있을 때부터 사후세계에 관심 가져야 좋은 사람 많아지고 세상도 밝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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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석조건축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피라미드의 축조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부활과 영생을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이 왕의 사후(死後) 시신을 보관하기 위한 무덤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후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종교는 없다. 거의 독자적인 고유영역이다. 종교를 종교답게 하는 핵심이다. 수렵채집 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발전한 게 종교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최초의 제도화된 종교에서는 사후세계관이 명확하지 않았다며 이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제기된다) 철학이나 이념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념체계(belief system)이지만, 이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일차적인’ 관심은 없다.(하지만 플라톤 이래 일부 철학자도 사후세계를 논한다)

[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4)]

종교와 사후세계의 밀접도·관련성을 따지는 데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사례는 유교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는 논란은 공자님이 말씀하신 다음의 두 마디 말에서 출발한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느냐.”[유교에 천(天)의 개념이 있으나 서양 종교의 인격신은 아니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이 또한 서구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공자님도 부처님도 예수님도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절·성당·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신앙인들도 막상 그 종교가 사후세계에 대해 뭐라고 가르치는지 의외로 잘 모른다. 물론 정확히 모를 뿐이지 어렴풋이는 알지만, 성직자나 종교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신앙인은 자신이 소속된 종교가 가르치는 것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것을 믿기도 한다.

왜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 답이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나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는 이 속담은 사후세계에 대한 심리를 잘 요약한다. 죽음·사후세계에 대해 살피는 것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이 아닐까?

논란 제외하면 남는 것은 결국 부처님·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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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死者의 書, Book of the Dead)>는 고대 이집트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 안내서다.

사후세계에 대한 상대적인 무지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들이닥칠 사후 운명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다. 자신이 아마도 어딘가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막연하나마 기대한다. 착하게 살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사에서 낙관은 금물이다. ‘나쁜 놈이 돼라’고 하는 종교는 없다. 모든 종교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을 중시하지만 단지 착하게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뭔가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하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제시하는 깨달음의 방법론을 이해해야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사후세계는 크게 두 종류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출발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 등 ‘아브라함의 종교(Abrahamic religions)에서는 천국·지옥을, 힌두교·불교에서는 윤회·해탈을 중시한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여성 호르몬 없는 남성, 남성 호르몬 없는 여성이 없듯이 동양 종교 속에 서양 종교, 서양 종교 속에 동양 종교의 요소가 내재한다. 유대교에서는 일부 윤회를 믿는 신자들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불교에서도 천당 관념이 있다.

예컨대 극락(極樂)이 있다. 극락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로, 괴로움이 없으며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난 곳에 있는 곳”이다. 또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도 부처님을 구세주라고 부른다.

이처럼 동서양 종교에는 차이점도 있고 공통점도 있다. 그런데 같은 종교라도 교단마다 사후세계가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통상 신(神) 같은 인격적인 존재의 개입 없이 사후세계에서 갈 곳이 결정된다.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는 염라대왕(閻羅大王)도 있다. 염라대왕은 “저승에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지은 생전의 선악을 심판하는 왕”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교단에 따라 죽은 자가 거치는 과정이 다르다. 죽으면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일종의 잠을 잔다는 주장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국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상으로 오시는 사건이라며 기성 생각에 도전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관련된 종교다.’ ‘불교는 부처님과 관련된 종교다’. 교단·종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한 것은 모두 제외하다 보면 부처님·예수님만 남는다.

가톨릭교회·정교회·개신교회에는 모두 천국·지옥이 있지만 그곳에 가는 방법이나 과정이 다르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은 천국, 못 받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간다.(‘거의’라고 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은 있어도 지옥은 없다’, ‘지옥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인도 많기 때문이다)

계(戒) 무시하고 ‘좋은 곳’ 기대하는 것은 ‘양심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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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불교에서 형상화한 지옥의 모습.

개신교에서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라는 질문에 즉각 머뭇거리지 않고 ‘그렇다’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한다. 가톨릭이나 정교회 신자들은 이 질문을 받으면 망설인다. 구원은 신(神)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건방진, 주제넘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정교회 책자에서는 한 가지 대처 방법을 제시한다. 개신교 신자가 물으면 ‘나는 구원 받는 중이다(I am being saved)’라고 대답하라는 것이다.

사실 천국에 대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소수다. ‘또 하나의 이스라엘’로 이해되는 미국에서도 그렇다. 선진국 중에서 미국은 ‘예외적’으로 종교가 강세를 보이는 나라다. 80%의 미국인들이 하늘나라가 있다고 믿는다.(영국인들은 30%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원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2010년 미국의 퓨리서치센터(PRC)가 조사해보니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쳐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16%였다. 미국 인구의 70.6%(개신교 46.5%, 가톨릭 20.8%)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다.(성경을 보면, 가톨릭에 유리한 구절도 무지 많고, 개신교에 유리한 구절도 무지 많다. 어쨌든 개신교나 가톨릭이나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은 신의 은총이다. 선물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선물을 받았으면 인간도 성의 표시는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십일조도 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한편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계속 ‘진화’한다. 예컨대 힌두교의 초기 경전에는 윤회나 업(業)의 관념이 희박했다. 유대교는 원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명확하지 않은 종교였다. 고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며 신을 경배하며 살아간 것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과 이스라엘 민족이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유대인들은 또 율법을 잘 지키며 착하게 살면 신(神)이 무병장수, 많은 자손과 가축을 주신다고 믿었다. 유대교에서 의로운 사람이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관념은 기원전 2세기 정도에 정립됐다. 예수님 시대만 해도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을 믿는 바리새파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며 바리새파의 주장을 거부하는 사두개파로 당시 유대 종교계가 나뉘어 있었다. 현대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도래, 최후의 심판을 믿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심판은 개인차원보다는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다.

거짓말은 지옥에 가게 되는 ‘대죄(大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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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

공식 교리는 안 바뀌어도 일반 신앙인의 사후세계 인식은 바뀐다. 특히 올바른 신앙을 위해 지켜야 하는 사항에 대해 생각이 보다 느슨해졌다. 한데 그리스도교나 불교는 최소한 그 출발이 지극히 래디컬(radical·근본적인)하고 철두철미하다. 우리나라 양대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각기 지키라고 하는 오계(五戒)와 십계명을 예로 들어보자. (‘계(戒)’를 무시하고 ‘좋은 곳’을 기대하는 것은 아마도 ‘양심불량’이 아닐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오계에 대해 이렇게 나와 있다. “속세에 있는 신자(信者)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행(淫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다.”

십계명(十誡命)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하나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다고 하는 열 가지 계율.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 우상을 섬기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말 것, 안식일을 지킬 것, 어버이를 공경할 것, 살인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 것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 계율이다.”

오계와 십계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어쩌면 가장 ‘사소해’ 보이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원칙적으로는 불교나 그리스도교나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 거짓말 좀 했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좀 너무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편하고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불교 최초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또 했으면서 안 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둘 다 똑같이 행동이 비열한 사람들이라 죽은 후에는 똑 같은 지옥에 떨어진다.”

가톨릭의 경우에도 거짓말은 지옥에 가게 되는 대죄(大罪)다. 6세기까지는 거짓말을 포함해 대죄를 범한 사람은 고해성사를 일생에 한 번만 받을 수 있었다. 대죄인도 고해성사를 한번 이상 반복하여 볼 수 있게 된 것은 중세부터다.

이기심도 지옥에 가는 죄다. 이기적이라고 해서 감옥에 가두는 정부는 없다. 하지만 종교는 엄격하다. 부처는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그것을 혼자서만 독차지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자선사업에 힘쓰는 서양 부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못지않은 예수님의 수제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전에도 경고한 바 있지만 지금 또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5:19~21)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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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드리는 상주권공재(常住勸共齋, 영혼을 천도하는 종교).

지옥에 머물러야 하는 기간에 대해서도 불교·그리스도교는 엄격하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영원히 있어야 한다. 불교도 엄격하다. <숫타니파타>에 이렇게 나와 있다. “홍련지옥(紅蓮地獄)에 떨어진 사람의 수명은 수레에 실은 깨알의 수만큼 된다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헤아렸다. 즉 그 수는 5조5000만 년이다.”

지옥의 형벌이 너무나 끔찍하기에 지옥과 천국 사이에 뭔가 중간지대가 필요했다. 가톨릭에서는 16세기에 확립된 교리인 연옥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천국행이지만 남은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불교에서도 지옥에 갈 죄는 없지만, 그래도 죄가 있는 중생들은 축생도(畜生道)에 사람이 아닌 동물로 태어나거나 아귀도(餓鬼道)에서 아귀로 태어나 배고픔에 시달린다.

지옥의 반대말은 천국이다. 그리스도교의 천국은 신(神)과 함께 있어서 한 없이 기쁜 곳, 지옥은 신이 없기에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이다. 불교에도 6단계의 천국이 있다. <숫타니파타>에 보면 “열심히 살고 있는 재가자는 죽은 후 ‘저절로 빛이 난다’는 신들 곁에서 태어나리라”고 돼 있다. 하지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해탈이다.

임사체험(臨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주목 받고 있는 티베트 불교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에 보면 ‘흰색 빛’은 신들이 사는 곳의 통로다.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파란 빛’을 따라가야 한다. 불자라면 ‘파란 빛’을 선택해야 한다. 부처가 되려면 인간 세상에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윤회에서 벗어나 태어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영원히 죽은 것인가. ‘그리스도교는 영원한 생명을, 불교는 영원한 죽음을 약속하는 종교’라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열반 이후의 상태에 대해 부처님은 침묵했다.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고 침묵한 14가지 무의미한 질문, 즉 ‘십사무기(十四無記)’에서 보면 여래는 죽은 후에도 (1)‘존재한다’ (2)‘존재하지 않는다’ (3)‘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4)‘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 올바른 결론이 아니다.

흔히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달라진다고 한다. 특히 남들에게 너그럽게 되고 잘 베푼다. 임사체험은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 사후세계와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임사체험을 통해 터널·빛·대문을 보게 되고 유체이탈, 마음의 평화, 자신의 인생 되돌아보기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삶이 바뀐다고 한다.

죽음이 멀리 있을 때부터 좋은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질 때 세상이 더 밝아지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이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관심의 출발점은 죄와 관련된 고통, 생로병사와 연관된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려고 시도해온 종교에 대한 관심이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 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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