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강경파, '강령' 놓고 노선투쟁…중도파 "예송논쟁과 뭐가 다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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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의 노선투쟁이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김종인 체제’에서 숨죽이고 있던 강경파 인사들이 새 당 강령의 내용을 놓고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다. 여기에 당 대표 후보들과 일부 최고위원 후보들까지 가세하면서 8·27 전당대회 이후 벌어질 더민주 내부 갈등의 전초전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더민주 최재성ㆍ정청래ㆍ김용익ㆍ김현ㆍ최민희 등 전직 의원들은 15일 국회에서 긴급간담회를 열고 강령 개정에 대한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들은 문재인 전 대표 시절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지내며 친노·주류로 분류됐지만 4ㆍ13 총선에서 대부분 불출마하거나 낙천ㆍ낙선했다. 이날 간담회는 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에 이뤄진 총선 이후 강경파들의 사실상 첫 공동행동이다.

이들은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존중한다’는 강령 전문에서 ‘노동자’라는 표현이 삭제된 것을 문제삼았다.

간담회에 참석한 정 전 의원은 “강령에서 열거하는 것은 당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라며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빼는 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듯 더민주 강령에서 노동자를 빼는 것은 노동자 정책을 경시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버스로 치면 노동자마을을 풍요롭게 해준다며 정류장을 뺏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추미애 후보가 온ㆍ오프 네트워크 정당을 강력 추진하겠다는 액션 플랜에 동의하기 때문에 지지를 선언한다”며 8ㆍ27 전당대회에 당대표 후보로 출마한 추 의원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정 전 의원이 언급한 '네트워크 정당'은 온라인 당원을 통한 당 운영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문재인 전 대표가 정당의 혁신모델로 제시했던 방안이다.

최재성 전 의원은 ‘서해평화협력지대’를 거론했다. 그는 “남북문제와 동북아평화안보 문제의 핵심 정책”이라며 “10ㆍ4 정상회담의 핵심을 강령에 설정했던 것은 이것을 통해 남북평화로 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해평화협력지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내용으로, 이 표현도 강령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의원은 “아직 이 문제가 비대위에서 결정되지 않았다. 당은 (노동자 삭제 등의) 강령 변경을 허용할 정도로 녹록한 곳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김영주 의원과 여성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양향자 후보도 참석했다. 김 의원은 “추미애 의원과 김 의원을 지지한다”는 참석자들의 발언이 이어지자 “일부에서 추 후보와 짝짓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하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노동자 강령 삭제에 반대하고 네트워크 정당 건설 얘기를 위한 정책적 연대”라며 선을 긋기도 했다.

당 대표 후보인 추미애 의원은 간담회 직후 국회 정론관에서 별도 기자회견을 열고 “강령 개정은 절차와 내용에서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노동자' 문구 삭제에 대해 지도부가 늦게나마 재고의 뜻을 밝힌 것은 다행이지만 6ㆍ15, 10ㆍ4 정신이 훼손된 점은 심히 우려스럽다. 전대 이후 새로운 지도 체제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날 논평을 통해 “강령의 첫 문장을 바꾼다는 것은 당의 정체성을 바꾸겠다는 의미”라며 강령 개정에 반대했던 또다른 주류 후보인 김상곤 후보는 이날은 별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집단행동에 나선 주류의 움직임에 대해 당내에서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내 주류 강경파들이 노선투쟁을 앞세워 김종인 대표 사퇴 이후 당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반응이 나왔다. 당내 강경파들은 현 지도부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ㆍ사드) 체계에 대한 찬반 당론을 정하지 않는 ‘무당론 원칙’에 대해서도 소셜네트워크(SNS) 등을 통해 연일 비난을 가하고 있다.

중도파로 분류되는 정성호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강령 문구 하나를 놓고 벌이는 투쟁이 과거 조선시대에 상례(喪禮)의 기간을 놓고 남인과 서인 사이에 벌어졌던 예송논쟁(禮訟論爭)과 뭐가 다르냐”며 “이런 논란이 이른바 친문 진영 전직 의원들의 집단적으로 반발로 나타나면서 '노선투쟁의 배후에 문재인 전 대표가 있다'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어 “강경파들이 강령 개정의 ‘주범’으로 김종인 대표를 지목하고 있지만, 정작 비대위원인 내가 아는 한 비대위에서 강령에 관한 구체적 논의가 진행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김종인 대표는 이날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얼마나 말이 궁색한지를 알겠다”며 “다른 특별한 얘기를 할 게 없으니 그런 걸 갖고 마치 선명성 경쟁을 하듯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라는 문구 삭제에 대해서도 “비대위에 아직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도 그게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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