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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엔 고속도로 있으니 스포츠카 테스트 할 수 있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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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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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creativity)과 혁신(innovation).


정부가 ‘창조경제’란 기치까지 내걸며 강조해 왔지만 어쩐지 주눅 들어 있는 두 단어다. 정부가 북 치고 장구 치며 나선다고 갑자기 없던 ‘창의’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애플·구글·아마존·알리바바·테슬라·샤오미…. 이들의 혁신을 배우고 뒤따라가야 한다는 의무감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돼 버렸다.


그런데 최근 시장에선 작지만 의미있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세계적인 ‘큰손’들이 한국 업체에 투자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대부분 회사의 성장성을 높이 평가해 이뤄지는 투자다. ‘수익 좇기’가 제1 목적인 글로벌 머니들이 한국의 비즈니스 모델을 ‘돈 되는 사업’이라고 판단한 셈이다.


어떤 기업들이 외국 큰손의 투자 리스트에 올라있고 이런 기업들은 어떤 특징을 가졌을까. 투자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들은 일명 ‘한국형 혁신기업’이다.


“한국은 중국의 젊은 여성들이 제일 가고 싶어하는 나라 중 하나예요. 중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있고, 예쁜 옷과 좋은 화장품이 있죠. 제가 명동 매장에서 진행한 생방송을 보고 ‘중국에서 찾기 어려운 립스틱이다. 어떻게든 사고싶다’는 문의가 폭주해 결국 구매채널을 알아내 수백 개의 제품을 판매했어요.”


지난 5일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회관.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중국인 민은(敏恩)씨의 얘기다. 그는 중국 인터넷상에서 K패션·뷰티 ‘왕홍(網紅·파워블로거)’으로 활동하는 유명인사다.


최근 성사된 투자를 보면 단연 ‘K 뷰티(Beauty)’가 돋보인다. 세계 1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18일 글로벌 사모펀드 베인캐피탈과 함께 카버코리아에 3500만 달러(387억원)를 투자한다고 밝혔다. 카버코리아는 ‘김혜수 아이크림’으로 유명한 A.H.C 브랜드를 거느린 국내 화장품 업체다. 나흘 뒤인 22일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기업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그룹의 투자 계열사 L캐피탈아시아가 국내 색조 화장품업체 클리오와 5000만 달러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화장품은 새로운 산업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화장품은 중국의 거대한 ‘한류’ 효과와 제품 자체의 ‘혁신성’을 앞세워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재탄생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와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외를 합한 중국인들의 화장품 소비시장 규모는 460억 달러에 이르고 2020년에는 680억 달러까지 급팽창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화장품 업체들은 그 최대 수혜주다. 투자자들은 K뷰티 열풍이 한류와 접목해 굴러가는 점에 주목한다.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란 전망이다.


실제 한국 드라마와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 이어 이제는 ‘뷰티 아티스트’들이 K뷰티의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한류 스타들의 메이크업을 책임지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의 노하우와 뷰티 철학을 가지고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민은씨 같은 뷰티 왕홍이나 한국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을 ‘뷰티 멘토’로 삼으려는 중국인들의 수요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화장품 수출은 2014년 15억93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4억3900만 달러로 53.1% 증가했다. 지난해 화장품 수출의 절반 이상이 중국으로 갔고 수출액도 전년 동기 대비 무려 250.6% 증가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한국 화장품의 혁신성이다. 아모레퍼시픽이 2008년 세계최초로 개발한 ‘쿠션(Cushion)’이 그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쿠션은 선크림·베이크업베이스·파운데이션 등을 모두 합쳐 스펀지에 흡수시켜 간편하게 바를 수 있도록 고안한 제품이다. 화장품 종류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다양하다. 고객별 니즈를 무궁무진하게 만족시켜준다는 얘기다.


“한국 화장품은 기발하다고 해요. 중국 여성들은 그동안 스킨·로션만 2가지만 발랐는데, 한국엔 부스터·에센스·아이크림·수분크림·리프팅크림 등 기초 화장품만 해도 5~6가지가 넘죠. 마스크팩은 또 어떤가요. 용도별로 보습·미백·탄력·트러블진정·브라이트닝·모공수축 등 별의별 게 다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중국 등 동남아 국가의 화장기술이나 문화 자체를 바꾸고 있어요.”


화장품 브랜드 ‘닥터자르트’로 알려진 해브앤비 관계자의 말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세계 2위 화장품 기업인 에스티로더컴퍼니즈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았다.


최근 한국 업체들은 바르는 화장품에서 ‘먹는 화장품’으로 또 하나의 혁신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이승욱 SK증권 연구원은 “세계적으로 바르는 화장품보다 피부 흡수·침투율이 좋은 먹는 화장품, 즉 이너뷰티 관련 제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며 “중국을 중심으로 알약·과립·드링크제·젤리 등 다양한 타입과 제품력을 앞세운 한국의 이너뷰티 제품이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과 뷰티를 접목한 사업모델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10일 미미박스는 벤처투자전문회사(VC) 포메이션 그룹과 굿워터 캐피탈로부터 약 73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받은 투자까지 합치면 1100억원이 넘는다. 미미박스는 고객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제품 개발로 연결시키는 게 사업모델이다. 겉으론 화장품 회사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엔지니어 비중이 35%에 달하는 IT회사다. 엔지니어들은 1200개 화장품 브랜드, 300만명 이상의 고객 데이터를 빅데이터화한다.


하형석 미미박스 공동 창립자는 “세계적으로 모바일·화장품·바이오 산업이 가장 유망한 산업으로 떠올랐다. 이것이 대규모 투자 유치의 성공 요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은 근대 산업혁명 이후 유럽과 미국처럼 기술 혁신의 주도권을 쥔 적이 없다. 시대의 패러다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뀔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스마트 시대’로 바뀌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사물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 시대에 생활과 소비의 중심은 모바일이다. 한국은 이런 미래상을 가장 응축적으로 보여주고 실험해 볼 수 있는 최상의 국가가 됐다. 현재 한국의 인터넷 평균속도는 29Mbps로 세계 1위, 스마트폰 보급률도 91%로 세계 1위다. 산업도 제조업과 서비스 모두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있다.


특히 전체 5160만 명 인구의 70%가 서울 등 전국 대도시에 거주한다. 그 안에서 성장해 온 다양한 오프라인 서비스가 새로운 온라인 서비스와 자유롭게 결합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은 세계적으로 거대한 성장 잠재력을 지닌 O2O(Online to Offline, 온라인 연계 오프라인)서비스의 테스트베드인 셈이다. 어떤 사업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 실제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한국의 대도시형 거주형태는 미국·유럽·중국·일본 등의 대도시와 비슷해 한국 업체의 성공이 다른 시장에서 사업을 할 때 좋은 벤치마크가 될 수 있다.

1 2014년 말 골드만삭스로부터 3600만 달러를 투자받은 배달앱 업계 1위 우아한형제들 사옥 로비. [사진 우아한형제]

2 이달 5일 서울에서 중국의 유명 파워블로거 민은(敏恩)씨의 K스타일 강연회가 열렸다. [사진 카페24]

전성민 골드만삭스 상무는 “한국형 혁신기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기존 산업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IT를 활용해 융합해 낸다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대표적인 예가 쿠팡이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스마트폰 ▶인터넷 등 통신망 ▶로켓배송(당일 배송) 이라는 3가지 아이디어에 환호했다. 10억 달러를 조건없이 쿠팡에 투자했다.


김범석 쿠팡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건 (쇼핑을 위해) 모바일을 탭하는 순간부터 쿠팡맨(배송기사)이 웃으면서 배송하는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모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인터넷 인프라가 좋아서 아마존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넣어도 로딩 속도가 빠르다. 고속도로가 있기 때문에 스포츠카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골드만삭스가 투자한 ‘우아한형제들’과 ‘직방’역시 한국이어서 가능한 사업 모델이다. 우아한형제들이 운영하는 ‘배달의 민족’은 사용자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배달 음식점들의 메뉴·가격·음식점평가를 확인해 결제까지 할 수 있는 음식주문 배달 플랫폼이다.


골드만삭스 관계자는 “미국에도 온라인을 이용하는 비슷한 음식배달 서비스가 있었지만 맨해튼 같은 대도시에서만 가능했고, 다른 곳들은 테이크아웃(포장)이 더 성행한다”며 “한국은 PC 외에 스마트폰을 많이 쓰고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가 많은 게 배달서비스의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모바일을 많이쓰는 대도시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그래서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에서 중국과 아시아의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이다.


소셜커머스 티몬에 투자한 미국계 사모펀드 KKR(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의 스테판 고 매니징디렉터는 “이 시대의 뚜렷한 변화는 소비자들이 모바일커머스로 이동해 편리함과 소비의 가치를 찾는 것”이라며 “한국은 이런 변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크고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평가했다.


전·월세 부동산 정보서비스를 제공하는 ‘직방’ 역시 한국만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탄생한 스타트업이다. 직방은 전국의 부동산 중개업자와 세입자를 연결해주는 앱(애플리케이션)으로, 업계에선 연간 2조원 규모의 부동산 정보 가운데 10% 정도가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관계자는 “일본·중국도 한국처럼 원룸에 사는 인구가 점점 늘어날 것”이라며 “직방은 이사 정보 등을 활용해 청소·포장이사·인테리어 등 수많은 관련 사업을 붙여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메가 트렌드 사업 모델”이라고 성장성을 높게 봤다. 실제 직방은 지난 8일 “매월 이용자를 선정해 거주하는 집 인테리어를 무료로 고쳐주는 ‘직방하우스’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부족한 기술과 경영 노하우 탓에 늘 선진국 사업 모델을 따라가기만 하던 한국 업체들이 어느새 전 세계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트렌드세터(Trend-setter)로 떠올랐다. 창의성과 혁신은 정부의 정책이나 캐치프레이즈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선수들이 뛰어노는 시장에서 움트고 있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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