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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Deja vu by system #1.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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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ja vu by system  #1. 꿈

쿠쿠, 쿠쿠쿠쿠, 콰쾅!

수십 차례의 번쩍임과 함께 고막이 찢어질 듯 요란한 소리에 깜짝 놀란 소년이 뒤를 돌아봤다. ‘검은 빛의 거대한 덩어리’가 그쪽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괴이한 광경이었다. 안개 같기도 하고 먹구름 같기도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기묘한 광채를 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자신의 색과 똑같은 빛줄기를 사방으로 쭉쭉 뿜어냈는데, 뻗어 나온 빛줄기들은 물속에 퍼지는 검은색 잉크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소년이 허망한 눈길로 그쪽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 앞으로 뭔가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들릴 듯 말 듯 한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들’이었다.

사람과 동물이 뒤섞여, 놈이 쏟아내는 수천가닥의 빛줄기를 피해 달아나는 중이었다. 빛줄기들이 촉수처럼 움직여 살아있는 것들을 마구 공격했고, 걸려들은 생명체들은 무조건 놈의 중심부로 끌려올라가며 산산이 분해가 되고 조각이 났다. 그제야 소년이 정신을 차렸다.

‘도망쳐야 해!’

소년은 허둥거리며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땅이 질척해 계속 미끄러졌다.
소년은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내달렸다. 그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쭈그려 앉았다. 발바닥에서 시커먼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보니 사방으로 날카로운 칼날더미가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상처를 부여잡고 뒤쪽을 바라봤다.
대여섯의 빛줄기가 소년이 있는 쪽으로 꼬불꼬불 뻗어오는 중이었다. 소년은 바지를 벗어 양발바닥을 감싸고 일어섰다. 등줄기를 넘어 머리통 끝까지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 고통을 억지로 참고 다시 뛰어가려는데, 어디선가 묘한 향취가 흘러와 소년의 어깨를 붙잡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년의 마음속에 갑자기 삶에 대한 의욕이 사라졌다. 동시에 다리 힘도 풀렸다. 소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때 뒤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도... 모어...치...”

소년은 풀린 눈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놈에게 쓸려 올라가며 버둥거리는 생명체 하나가 보였다. 그건 사람이었다. 그는 놈에게 뜯기기 바로 직전, 크나큰 절규를 터뜨렸다.

“도.. 망... 치라고!”

그걸 끝으로 그의 몸이 반투명(半透明)인 놈의 속에서 마구 뒤틀리더니 으스러지듯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소년의 귀에 둑덕둑덕, 둑덕, 둑덕... 맹렬한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건 공포보다 더한 것...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나약함에서 오는 소리였다. 본인의 몸까지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 순 없었다.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 옷소매를 찢어 입에 넣고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한쪽 정강이에 힘을 주었다. 극열한 통증에 해골이 바스러질 거 같았다. 정신을 집중했다.

‘나라도, 나만이라도...’

소년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밑에서 피가 스미어 나왔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의 무릎이 기계처럼 계속해 움직였다. 이윽고 고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지금의 이것이 아픔인지 다른 느낌인지, 알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년이 그렇게 사력을 다해 움직였지만, 바람보다 빠른 그것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빛줄기 몇 가닥이 포물선을 그리며 소년의 머리 위를 휙휙 지나가더니 소년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걸 본 소년은 제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명체란 생명체는 놈이 죄다 삼켜버렸는지 소년의 눈앞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빈터만 보일 뿐이었다.

나 혼자뿐인가?
1초, 2초도 되지 않는 동안 부모님, 동생을 비롯해 그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마구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소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빛줄기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이 소년을 향해 쭉 뻗어왔다. 피할 수도 없었지만, 소년은 그걸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빛이 소년의 가슴에 부딪치더니, 혈관을 타고 그의 몸 안에 퍼지듯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것에 소년은 고통이 아닌 묘한 흥분을 느꼈다. 동시에 머릿속 기억도 무뎌져갔다. 가족도 친구도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도 의미가 없고, 세상이란 것 자체가 그냥 하얀 백지장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막 잉태되어 자궁 속을 떠돌아다니는 태아처럼 극도의 안정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몸 전체가 둥둥 떠서 흐느적거리더니, 소년은 어느새 멀고 먼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까마득하고 까마득한 과거 속에 작은 점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놀랍게도 그건 소년 본인의 모습이었다.

과거의 소년 또한 소년을 놀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춘 것처럼 한동안 똑같은 행동을 하던 과거 속의 소년이 갑자기 손을 쭉 뻗었다. 소년이 몸을 움츠렸다. 과거 소년의 팔이 고무줄처럼 쭉 늘어나 소년의 가슴에 닿는가 싶더니, 갑자기 과거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의 심장을 붙잡고 있는 것은 시커먼 빛줄기였다. 그리고 그의 몸은 수십 미터 공중 위로 붕 떠올라있었다.

소년을 잡고 있던 빛줄기가 미세하게 파동을 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소년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년의 몸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하게 마취가 된 것처럼 소년은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멍한 눈으로 자신의 신체가 뜯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갈기갈기 파열된 신체조각들이 더욱 잘게 조각나더니 놈의 안으로 먼지처럼 스며들어갔다. 그리고 소용돌이 은하처럼 퍼져 완전히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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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초 걸리지 않아, 소년의 사지와 몸통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검은빛이 소년의 얼굴까지 타고 올라왔다. 순식간에 입과 코를 조각내더니 소년의 안구(眼球)를 조각내 광운(光雲)의 중심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소년은 엄청나게 놀라운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미세한 가루가 되어 이리저리 흩어져 버린 안구입자(粒子)들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안구가 되어 모두 특정의 시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본체와 떨어져있는 그것들은 마치 소년의 신경조직과 완벽하게 연결이 되어있는 것처럼 각각의 입자가 보내주는 독립적인 시각(視覺)의 광경들을 생생하게 소년의 뇌에 모조리 전달했다. 소년은 각기 다른 쪽을 향하고 있는 수천수만의 안구체들이 보내주는 영상을 역시 수천수만으로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시간으로는 채 0.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각각의 입자가 소년에게 보내준 영상들은 가스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태초의 우주공간의 모습 그 이상이었다.
실로 엄청나다는 말 외에는 인간의 말로써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소년의 뇌신경마저도 먼지처럼 쪼개져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생각도 극한으로 많아졌다. 그의 뇌세포가 이리저리 흩어지며, 저마다 다른 생각과 별도의 감정을 가진 수천 수억의 개별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비롭게도 그 모두에게 자아(自我)가 있었다. 그 자체가 소년이었고, 주체였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것들이 죄다 하나로 연계가 되어, 소년이 그 모두를 온전히 컨트롤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현상이 두렵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대형도서관의 그것처럼 깨끗하게 정돈이 된 느낌이었다.

분노, 사랑, 이기, 아픔, 행복, 좌절, 번뇌, 질투, 욕정, 기쁨, 슬픔, 환희, 절제, 증오...

분노는 분노대로 수천만 가지의 갈래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사랑대로 수억 가지의 잔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이 한데 엉켜 소년의 생각을 무한대로 늘려나갔다.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소년이 그것들을 파악하려는 순간, 푸른빛의 광운 줄기가 소년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삼켜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잔상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은 죽음인가? 아님, 또 다른 탄생인가?

... 둥둥둥.... 둥둥...

소년의 정신이 완전히 끊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소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그림자를 보았다. 서로 다른 그 수많은 것들이 결국 ‘하나’에서 시작하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악!”

소년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헉, 헉, 헉, 헉, 헉...”

어두컴컴한 공간 속엔 거친 숨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이었다. 차차 주변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낯익은 책상과 컴퓨터, 흰색 옷장 그리고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 그 옆으로 소년이 아끼는 붉은색 드론(Drone)과 미니 드론, 그리고 드론 분실대비용으로 구입한 위치추적박스도 그대로였다.

소년은 멍하니 있다가, 익숙한 체취가 느껴지자 숨을 후우 내쉬었다.
핸드폰을 터치하자 ‘오전 5시 30분’이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소년은 티슈를 뽑아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휴지조각이 금세 흥건해졌다. 그제야 소년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대체 뭐야. 또...’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섬뜩한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하지만 상처도 없고 피도 없었다. 가끔 남의 살을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정상이었다.

꿈... 바로 그 꿈이었다.

소년은 요 며칠사이 계속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올 때 즈음에 눈을 떴다. 더 이상한 것은 잠자리에 든 시간과는 상관없이 깨어났을 때의 시간이 늘 비슷하단 점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한 악몽인가? 다른 걸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허울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 괴상한 꿈을 꾼 날이면, 소년은 온 몸이 축 늘어져 도저히 가눌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프고 쑤실 때도 있었다. 몸이 그 꿈에 반응을 한다고 할까? 아니면, 단순한 느낌일 뿐인 건지. 어쨌거나 약물과 같은 것이 그의 몸속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소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짜증나네. 진짜!”

처음엔 그것이 가위의 일종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확신이 들었다. 포털 지식인에 물어봤더니, 신경정신과에 찾아가라는 의견에 추천수가 잔뜩 붙어있었다.

‘웃기는군!’

소년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어느새 창밖이 환하게 밝아져있었다. 소년은 다시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8월 4일, 오전 6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었다. 거실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방문을 닫고 창문을 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더운 기운이 훅 들이닥쳤다. 소년은 창문틈새에 숨겨놓은 담뱃갑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를 꺼내 물고는 선풍기를 창밖으로 틀어놓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몸 안을 가득 채우려는 듯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아찔하게 반응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 즈음, 길 건너 아파트 단지 사이로 주홍빛 태양이 보란 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으로 소년이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그와 함께 꿈속의 그것들도 희미해져갔다.

‘개꿈 같으니...’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벌 떨리는 그의 손가락과 눈동자는 머지않아 그에게 닥칠 신비하고도 끔찍한 그 모든 것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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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공포 미스터리 창작 전문 작가 그룹 언더 프리(Under Free) 부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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