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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인하 이후의 과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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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내 기름 값이 다시 10% 더 내림으로써 국제 원유가 하락의 혜택을 실감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기름 값 인하 과정을 살피면 우리의 에너지 정책도 상당한 기동성과 탄력성을 발휘하고 있음을 짐작케 된다.
유가 정책의 변경은 단순한 시장 상품 가격의 변동과는 달리 가격 기구의 전과정을 재편성하는 중요한 변화를 파급시키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는 신중할수록 좋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경기와 국내 경기가 함께 회복기에 들어 있고 이른바 3저의 복합 효과를 누가 더 효율 있게, 더 신속하게 살려내느냐가 중요한 때인 만큼 경제 정책의 탄력성이 매우 긴요한 시기다. 이 점에서 볼 때 국내 유가 정책은 일단 기대 이상의 탄력성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두 차례의 국내 유가 인하로 경제 각계에 돌아올 혜택과 파급은 거시적으로 총괄하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우선은 경제 성장율이 1% 가량 더 높아질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수지가 18억 달러 이상 개선되는 점이 가장 괄목할 만하다. 성장과 국제수지의 애로를 동시에, 그리고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단일 변수로는 기름 말고는 다시 찾기 어렵다. 그에 더하여 물가 안정까지 가능하게 되어 경제의 3대 역설로 일컬어지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여건이 수월해진 것일 뿐 그 자체로써 완결적인 충분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원유가의 대폭적인 하락은 경쟁력의 쇠퇴기에 접어든 선진 공업국들에 새로운 산업 쇄신의 계기를 만들어 줄 것이다.
더 가까이는 우리와 경쟁 관계에 있는 더 많은 신흥 개발국들에도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것 또한 분명하다. 말하자면 최근의 국제 원유가 하락은 선발·후발 공업국들을 새로운 출발점에 함께 모으는 계기가 된 셈이다.
유가 하락을 단순한 가격 경쟁력의 일시 회복제로만 활용한다면 이 새로운 장기 레이스에서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산업의 효율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설비와 기술의 대혁신이 고무되고 파급되지 않는 한 유가인하는 짧은 한때의 배부름으로 그칠 뿐이다.
더구나 국제 원유가는 장기로 볼 때 결국은 되오르게 되어 있다. 비록 아직은 OPEC의 단합이 지리 멸렬이지만 현재의 산유국 재정 형편으로 보아 더 이상의 생산 경쟁과 가격 하락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조만간 다시 생산 감축에 합의하고 가격 방어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더 빠를지도 모른다.
유가 정책뿐 아니라 경제 운영의 주요 방향도 이런 사정을 미리 반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의 혜택이 소비 증가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책으로 견제하고 차단하는 일이다. 두 차례의 국내 유가 인하와 원유가에 대한 낙관적 무드가 자칫 산업의 에너지 마인드를 크게 이완시킬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원유가 하락의 혜택을 상당 부분 조세 형태로 정부가 흡수한 것도 옳은 방향이 아니다.
그보다는 산업 합리화의 특수 목적으로 비축화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유가 하락에 따른 국내 유동성의 증가에도 탄력 있게 대응해야 한다. 이런 사후적 대응의 마련이 지금으로서는 더 중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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