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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자연스런 음악, 평창대관령음악제

중앙일보

입력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

베토벤 ‘C장조 미사’의 마지막 부분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 양)’ 중 ‘도나 노비스 파쳄’이 시작됐다. 소프라노 임선혜, 메조소프라노 모니카 그롭, 테너 김동원 베이스 박흥우 등 네 명의 성악가가 일제히 일어섰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국립합창단이 이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순간이었다. 숭고한 음악은 테러와 전쟁의 공포를 앓고 있는 지구촌에 보내는 치유의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7월 30일 밤, 강원도 평창의 알펜시아 뮤직텐트에서 열린 공연 모습이다. 12일 개막한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저명연주가시리즈4', ‘벨리니와 베토벤’이었다.

첫 내한한 미국 지휘자 켄트 트리틀은 합창음악에 강했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는 악장 신아라를 비롯해 김덕우(바이올린), 헝웨이 황(비올라), 박지은(플루트), 이연주(오보에) 등 서울시향의 멤버들과 권혁주(바이올린), 박상민(첼로) 등 솔로이스트들이 눈에 띄었다. 첫곡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에서 오케스트라는 맨손으로 그리는 트리틀의 지휘 궤적에 맞춰 긴장감에 찬 선율을 들려줬다.

이어서 벨리니 오페라의 명장면들이 선보였다. 벨 칸토(Bel canto), 말 그대로 '아름다운 노래'가 뮤직텐트를 가득 채웠다. 역시 첫 내한한 미국 소프라노 엘리자벳 드 트레요가 두각을 나타냈다. 벨리니 작품 해석을 장기로 하는 그녀는 ‘카풀레티 가와 몬테키 가’ 중 ‘행복에 겨운 나를 봐요’에서 크림 같은 목소리에 고음 처리가 원숙하고 자연스러웠다. 테너 김동원과 함께한 ‘몽유병의 여인’은 따스하고 다정했고, 난곡인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에서도 기교에 대한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휴식시간 뒤 베토벤 ‘C장조 미사’에서는 소프라노 임선혜의 호소력 짙은 가창이 돋보였다. ‘키리에’ 첫머리와 ‘글로리아’ 중 마지막 ‘아멘’ 부분에서 맑은 고음은 평창의 대기를 닮아 있었다.

PVF 재질로 둘러싸여 1100석의 좌석을 운용하는 알펜시아 뮤직텐트는 '야외 같은 실내 음악회'의 독특한 분위기를 제공했다.

이날 평창의 낮기온은 30도를 기록했다. 유례없는 더위는 해질녘에 수그러들었지만 뮤직텐트 안에서는 합창단, 오케스트라, 청중들의 열기로 가득찼다. 소프라노 엘리자벳 드 트레요는 “뮤직 텐트의 음향이 놀라웠다(phenomenal)”고 말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올해 주제는 ‘B B B자로...’다. 바흐, 베토벤, 브람스처럼 첫 글자가 B로 시작되는 작곡가의 곡들을 연주하고 있다.

29일 오후 7시 30분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린 '저명연주가시리즈2'는 프랑스 작곡가 장 바리에르의 트리오 소나타 D단조로 시작했다. 처연하고 느리게 시작해 점차 빨라지는 작품은 차분하고 슬픈 춤곡을 연상시켰다. 권민석의 리코더는 안정적이었고, 박진영의 첼로는 비올라 다 감바처럼 찰기 있는 소리를 냈다. 아포 하키넨의 하프시코드가 옛 음악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크리스토퍼 베르크의 ‘처음 듣는 듯 달콤한, 그러나 이미 들은 이야기들 : 페르난두 페소아’는 세계 초연곡이었다. 1악장 ‘시’에서는 소프라노 엘리자벳 드 트레요가 이야기를 들려주듯 노래했다. 김태형의 피아노는 무거운 발걸음 같았고, 에드워드 아론의 첼로가 추임새를 넣었다. 2악장 ‘어린이들의 시인’에서는 곡이 활기를 띠었다. 조명이 점멸하는 효과도 등장했다. 3악장인 ‘어디선가’ 역시 여운을 남기며 끝났다.

노부코 이마이의 비올라와 김태형의 피아노가 함께한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Op.120의 2번은 원곡인 클라리넷 소나타보다 훨씬 쌉싸래한 뒷맛을 남겼다. 이마이의 잿빛 비올라와 영롱하고 투명한 김태형의 피아노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보리스 브로프친ㆍ신아라(바이올린), 막심 리자노프ㆍ박경민(비올라), 에드워드 아론(첼로)이 연주한 브루크너 현악 5중주는 그의 교향곡과 사뭇 다른 모습의 실내악곡이었다. 가끔씩 멈추는 휴지부나 스케르초에서 교향곡의 자취가 느껴졌다. 아다지오 악장은 이 곡의 백미였다. 그의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숙연하고 숭고함을 들려주었다.

30일 오후 2시에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열린 저명연주가 시리즈3은 피아니스트 김다솔의 브람스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9로 시작했다. 김다솔은 몽환적인 슈만의 환상성을 품은 브람스의 두터운 피아노 음악세계를 선보였다. 격정의 표현도 강렬했다. 마지막 변주는 꿈을 꾸듯, 끝인 듯 아닌 듯 조용하게 끝났다. 관객들은 한참 후에 박수를 쳤다.

이어서 구천이 지휘하는 국립합창단이 바흐 모테트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니’ BWV226와 브루크너 모테트 ‘이곳은 신이 지으신 곳’과 ‘의인의 입’을 선보였다. 왠지 들뜬 듯한 바흐보다 차분하고 경건한 브루크너의 곡이 가슴 뭉클했다. 알레그리 ‘미제레레’를 연상케 한 소프라노 고음이 일품이었다.

폴 황(바이올린), 에드워드 아론(첼로), 노먼 크리거(피아노)가 윌리엄 볼컴의 ‘인트로덕션과 론도, 하이든과 숨바꼭질을’을 연주했다. 1938년의 작품치고 귀에 잘 들어왔다. 발랄하고 우아하게 흐르다 암울해지는 등 변덕스러운 진행이 톡톡 튀었다.

베토벤 현악 5중주 C장조는 미하엘라 마틴ㆍ폴 황(바이올린), 헝웨이 황ㆍ박경민(비올라), 박상민(첼로)이 연주했다. 밝고 경쾌한 1악장과 하강음형이 아름다웠고, 투쟁적인 반복구에서 베토벤이 느껴진 2악장, 풍부하고 위트가 녹아있는 부드러운 스케르초인 3악장과 폭풍우같이 변덕스러운 4악장 프레스토가 이어졌다. 미하엘라 마틴의 기교적인 제1바이올린이 곡 전체를 견인했다.

올해가 13회째, 평창대관령음악제는 공기 맑은 평창에서 자연과 음악의 만남을 구현하고 있다. 길을 걷다 첼리스트 지안 왕과 마주치기도 하고, 연습하는 학생의 피아노 선율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듣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런 음악을 느낄 수 있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8월 9일까지 계속된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ㆍ객원기자 mozart@joongang.co.kr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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