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9)-제84회 올림픽 반세기(58) 올림픽 첫 금메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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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뮌헨에서의 좌절은 4년후 몬트리올의 환희로 바꿔었다. 한국의 올림픽 도전 28년만의 영광이었다.
76년 7월31일 밤8시30분 몬트리올 모리스리처드체육관.
제21회 올림픽 폐막 전야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결승전. 폴이나 폴에 가까운 큰 점수차의 판정패만 당하지 않으면 금메달을 딸수 있는 절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고 있는 양정모는 상대선수인「오이도프」(몽고)의 사력을 다한 공격을 요리조리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몹시도 길었던 6분이 드디어 지나가고 종료 벨이 길게 올렸다.『와! 이겼다.』들뜬 함성이 벤치와 관중석으로부터 터져 나왔고 태극기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왠지 실감이 나지않아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장내 스피커가 『한국량정모우승』이라고 크게 알리는 순간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듯 벌떡 일어나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애국가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2위의 몽고기와 3위의 미국 성조기를 좌우에 거느리고 태극기가 게양되기 시작했다. 웅장한 애국가 합창이 실내를 진동시켰다. 눈물이 괴어올랐다. 온겨레의 숙원이던 올림픽 금메달을 기어이 따내고야 말았다. 실로 몇 년만이던가.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28년만이었다. 손기정의 눈물어린 금메달 이후 꼭 40년만이었다.
금메달 일보 직전에 주저앉은 적은 또 몇번이었던가.
동경 올림픽의 정신조가 그랬고, 멕시코 올림픽의 지룡주, 뮌헨 올림픽의 오승립이 그랬다. 이들은 금메달 획득의 실력을 충분히 갖추고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양정모의 금메달은 물론 정당한 실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다소간 운도 따랐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정모의 최강적은 역시「오이도픈」였다.
양정모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세계 챔피언인「오이도픈」를 꺾고 우승했으나 다음해인 75년 9월 소련 민스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선 패배, 동메달에 그침으로써 1승l패의 호각세를 이루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 여부는「오이도픈」를 꺾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전망이었다.
그「오이도픈」가 1차전에서 미국의「데이비스」에게 판정으로 지는 바람에 벌점 3점을 안게 됐다.
이후「오이도픈」는 나머지 대전을 모두 벌점없이 이기고 양정모와 만났다.
결승에서 양정모는 10-8로 판정패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무벌점이었던 양이 판정패로 3벌점을 안은 반면「오이도픈」는 근소한 차로 이겼기 때문에 벌점1점이 추가, 4벌점으로 은메달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양정모가 만약 이 결승전을 꼭 승리로 이끌어야만 우승할수 있었다면 그도 죽을 힘을 다해 맞섰을 터이니 이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양정모는 안전 위주로 게임을 이끌었던 것이다.
양정모의 우승에는 레슬링 협회 임원·코치들의 정성이 크게 공헌했다.
최자영지도위원· 정동구코치등은 고국을 떠나올때 비디오 녹화기를 가져와 매 경기를 테이프에 수록, 숙소에 돌아와 밤늦게까지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검토, 분석하고 이에 걸맞은 작전을 수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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