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배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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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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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 3번기 1국> ●·커제 9단 ○·스웨 9단

6보(77~90)=좌상귀 78에 별 고민 없이 막은 79는 커제의 포만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느긋한 수. 미세한 국면이었다면 ‘참고도’ 흑1, 3을 먼저 선수해두고 가지 않았을까. 실전과 ‘참고도’의 차이는 제법 크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읽기가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 이렇게 느슨하게 움직이는 건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방증이다. 기풍과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프로들은 넉넉하게 앞선 국면이라면 실리의 득실보다 변화의 여지가 없는 두터운 수로 안정을 추구한다. 상변 흑의 움직임은, 사냥과 식사를 다 끝내고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같다. 가젤과 영양과 누의 무리가 눈앞으로 지나가도 본체만체하는 배부른 사자처럼 80부터 89까지, 백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준다.

좌변 백의 세력이 너무나 쉽게 흐트러진 뒤 백 쪽에는 우하 일대 흑의 기름진 옥토와 비견될 만한 땅이 없고 그렇다고 미래를 기대할 두터움으로 앞서는 것도 아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흑이 좌변으로 침입했을 때 스웨의 전략 선택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백이 부지런히 따라잡고 있기는 한데 판이 너무 알기 쉽게 정리되고 있다. 중국 검토 좌석의 목소리가 조용한 이유는 어느 쪽이 이겨도 중국 우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난전과 변화의 징후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손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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