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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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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처용가』는 잘 알려진 신라 향가다. 그게 아마도 간통을 다룬 우리 문학의 효시일 것도 같다.
『서울 밝은 달과 함께 밤들도록 놀러 다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본시 내 것이지만 빼앗거늘 어찌하리. 』
아내가 외간 남자와 간통을 하고있는 현장을 보고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추면서 물러 나갔다는 것이 처용이다.
처용의 이 바다 같은 도량에 감복한 간부 역신이 처용의 형용을 그린 그림만 그려 붙여도 다시는 범접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 설화로 전한다.
이 노래로 신라의 분방한 성 풍속의 일단을 엿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간통이 용납되진 않았던 것도 알 수 있다.
『고려사』 의 기록을 보면 고려 때도 간통문제가 엄하게 다스려지고있다.
원종 9년 장군 주선이 숙부의 처 대씨와 정을 통했다가 드러나 어사대가 대씨를 잡아 신문 끝에 죽였으며 선의 목도 베었다.
일가 친척간의 간통은 사형이 흔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노동형인 도형 2, 3년이 보통이다.
서양에서도 간음은 엄한 처벌을 받았다. 성서에서 규정한 「간음」 은『배우자가 있는 자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행위를 하는 것』 이다.
구약에서 보면 제7계명을 범한 「간음한 자」 는 처형을 받았다. 돌로 쳐죽이는 것이 간음한 남녀에게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다만 율법은 간음에 대한 명확한 확증을 요구했다.
고발당한 유부녀는 대개 「쓴 물」을 마셔 무죄를 입증해야했다. 그「쓴 물」 은 성막 바닥의 티끌을 섞은 물에 여인의 맹세를 적은 두루마리 먹물을 빨아 섞은 것이다. 그 물은 결코 더러운 물은 아니었으나 시험 당하는 이들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고 때론 탈을 일으켰다.
하무라비 법전이나 로마법시대에도 간음은 엄벌되었다.
그건 배우자의 권리침해며 동시에 사회에 대한 파괴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간음한 자를 죽이는 형벌이 없어진 것은 AD30년이었다. 남자들의 도덕적 타락이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성의 개방이 보편화된 시대에 간통죄가 없어지는 것도 같은 추세다.
하지만 프랑스조차 간통을 범죄로 다루지 않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미국은 1955년에 간통을 형법 조문에서 제외했다. 영국이나 일본도 간통죄 는형법에 없다.
최근 우리 법조계가 「간통죄」를 형법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은 그런 시대 사조의 반영이다.
그러나 간통이 형법 위에 있는 영적인 순결과 도덕 질서의 가치를 해친다는 인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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