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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4404)|제80화 올림픽 반세기(53)|멕시코대회 뒷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멕시코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단은 은1 동1개로 1백8개국 가운데 36위를 차지했다.
미국이 금45·은28·동34로 1위, 소련이 금29 은32 동30으로 2위였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선수단은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쳤으나 예술문화행사단은 대단한 성과를 올린 것으로 기억된다.
KOC는 멕시코 올림픽이 생소한 땅 중남미 대륙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선수단 외에 82명의 예술문화행사단을 파견했다.
유한철KOC의원을 단장으로 한우리 예술문화행사단은 올림픽 기간중 벌어진 청소년 올림픽 캠프·민속예술제·어린이 벽화전·예술선정 작품전등을 통해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예술제에 참가, 절찬을 받았던 선화무용단은 10월14일 올림픽 선수촌에서 2천여명의 각국 선수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1시간가량 특별공연을 가졌다.
방아타령등 고전무용의 신비스런 율동에 매료된 외국 선수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으며 우리선수단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20일밤 청소년 캠프 (와스테펙바카시오날센터)에서는 미스 월드 유드 캠프 선발대회가 열려 김예리양이 은메달격인 공주상 을받았다.
김양은 조선시대고 궁중복을 입고 참가했는데 5분 스피치때 즉흥 연설로 점수를 많이 땄다는 후문이다.
김양은 김종필씨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에 재학중이었다.
저개발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멕시코 올림픽은 미 혹인 선수들의항의, 남아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잡음, 학생데모등의 와중에서도 훌륭히 치러진 대회였다고 평가된다.
63년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제19회 올림픽의 멕시코 개최가 확정되는 순간부터 멕시코 정부는「구스타보」대통령의 진두지휘로 범국민적인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당인 입헌공화당의 50년 독재에 염증을 느낀 대학생 주축의 반정부세력은 올림픽이 다가와도 끊임없이 시위와 투쟁을 전개, 「구스타보」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올림픽 개막 2주 전에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경찰이 발포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러 위기감을 자아냈으나 멕시코 대학생 지도자들이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 기간중에는 자제하겠다』며 애국심을 발휘함으로써 무마됐다.
대회 기간중 육상 남자1백m 우승자인 미국의 흑인선수 「하인즈」와 2백m 우승자「스미드」는시상식에서 수상을 거부하는 소동을 빚었다.
남아공화국의 흑인선수들에게 출전의 길을 열어주지 못한 「브런디지」IOC위원장에 대한 반발이었다.
미국의 혹인 선수들은 당초 IOC가 인종차별국인 남아공화국의 참가를 승인하자 집단 보이코트를 선언한 적이 있다.
결국 남아공화국이 출전을 포기함에 따라 올림픽은 순조릅게 출발했으나 흑인 선수들의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멕시코 올림픽은 「기록의 올림픽」 이라고도 했다. 모두 44개의 세계신기록이 쏟아졌는데 육상에서만 31개였다.
기압이 낮은 고원지대에서는 공기의 저항을 덜 받기 때문에 기록 러시가 가능했다.
한펀 북한도 멕시코 올림픽에참가를 신청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DPRK대신 「노드 코리어」라는 호칭이라야만 한다는 조건으로 IOC의 승인을 받았다.
북한은 처음 이를 수락, 10월10일 59명의 선수단을 파견키로 했다가 결국 생트집 끝에 불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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