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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숨을 곳도 쉴 곳도 없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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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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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우 민정수석은 엊그제 청와대 기자실에 나타나 “이런 문제를 갖고 공직자가 관둬선 안 된다. (정무적 책임은) 안 맞는다”고 했는데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이런 문제’란 자기는 김정주도 알지 못하고 진경준을 통해 땅을 사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언론·정치권이 몰아가고 있다는 불만이다. 하지도 않은 일에 왜 책임을 지냐는 얘기다. 짧은 생각이다. 그는 기자실이 아니라 발걸음을 반대로 돌려 대통령 집무실로 갔어야 했다. 지금도 늦지 않다. 박 대통령을 오늘이라도 만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옷을 벗고 결백을 증명하겠습니다”라며 사직서를 제출하는 게 순리다.

본인은 억울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무적 책임은 원래 그럴 때 지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무직 공무원 아닌가. 이번 정부 들어 차례로 민정수석을 지냈던 곽상도(인사검증 실패), 홍경식(총리 후보자 연쇄 낙마 책임), 김영한(국회 출석요구 거부) 등 그의 선배들은 지금보다 경미한 일에 정무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모시는 대통령한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게 첫 번째였고 파장의 확산을 막겠다는 충정이 두 번째 이유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부당한 모욕과 수치로부터 최소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게 세 번째다.

우 수석은 세 가지 사항 모두 해당한다. 기자실 발언으로 입장을 충분히 밝혔으니 이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사퇴 의사를 분명히 할 때다. 대통령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그동안 대통령이 보내준 신임에 비추어 ‘설마’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마음일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벌써 국정 운영의 새 판을 구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꼭 박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권력은 냉혹할 정도로 맺고 끊는 속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청와대의 다른 수석들이나 대변인도 우병우를 비호하다간 물색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오래된 법언(法諺)에 “법은 공정할 뿐 아니라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병우는 공정할지 모르지만 공정하게 보이는 데 실패했다. 민정수석은 공직기강 점검과 고위 공무원의 인사검증 주체인 데다 검찰·국정원·국세청·감사원·경찰 등 모든 사정기관의 예민한 칼날을 조절하는 통치의 등뼈 같은 자리다. 그 자리에 대해 국민 의심이 퍼지는 것만으로도 등뼈가 휘어진 사람처럼 나라 기강은 휘청거린다. 형벌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죄의식 없이 큰 도적, 작은 도적이 판을 친다. 이처럼 민정수석의 위태로움은 대통령을 힘들게 만들 수 있다.

사실 문제적 상황에 직면한 건 우병우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김정은의 핵·미사일과 싸우고 있다. 어제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호소하면서 “저도 지금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는데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숨을 곳도 쉴 곳도 퇴장할 곳도 없는 대통령의 비장함과 결기가 느껴졌다. 우병우는 다른 선수로 교체하면 그만이지만 박 대통령은 그럴 수가 없다. 박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군 최고책임자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국민과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갈 생각도 해야 한다. 국민과 함께 안보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병우와 거리를 두는 게 좋다. 새로운 플레이를 시작해야 한다.

새누리당은 친박 패권그룹의 소멸이 임박했다. 최경환·윤상현·현기환 등이 박 대통령을 팔아 돌아가면서 공천 협박을 하는 전화 녹음이 그들의 정치적 수명을 재촉했다. 감정의 파동은 이성의 판단보다 치명적이다. 친박 핵심들의 권력 사유화 현장 중계는 그들이 얼마나 난폭하고 조직적이며 부도덕한지 국민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친박은 주홍글씨로 낙인찍혔다. 수치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당·정·청 곳곳에 뿌리내린 친박의 패권적 요소와 문화는 퇴조할 것이다. 공정성과 도덕성과 실력을 갖춘 새 진용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박 대통령은 예를 들어 사드 배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유승민 의원 같은 비박들을 폭넓게 쓰면 좋을 것이다. 집권세력의 전면적 재구성이 박 대통령이 승부를 걸어야 할 곳이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