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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퍼스트 맨’을 영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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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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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남성분들께 묻는다. 여자친구 또는 부인이 “대통령이 될 거야. 아니, 당신 말고 내가. 그러니 도와줘”라고 선언한다면?

기꺼이 부인을 외조, 아니 내조할 수 있을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필립 메이는 그렇게 했다. 영국 사상 두 번째 여성 총리가 된 테리사 메이의 남편 얘기다. 필립 역시 학생 시절엔 정치인을 꿈꿨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생 중에서도 엘리트만 모인다는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했을 정도로 야심도 컸다.

테리사는 10대 소녀 시절부터 “내 꿈은 이 나라의 총리야”라고 했던 인물. 필립은 금융계로 진출했고 부인을 물심양면 지원했다. 지난 13일 부인의 바로 뒤에서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발을 들이는 필립의 표정은 온화하면서도 우아했다. ‘잘난 부인에게 기가 눌린 못난 남편’이라는 이미지나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과는 안드로메다 은하만큼이나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참, 멋졌다.

기자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가 아닌 퍼스트 맨(First Man)을 맞이한 영국도 들썩였다. 필립 메이가 부인의 취임식 날 착용한 구두와 양복을 두고 미러·메트로와 같은 영국 매체들은 “섹시하다”는 표현을 동원해 찬사를 쏟아냈다. “취임식의 주인공은 총리가 아니라 그의 남편이었다”는 헤드라인도 나왔다.

‘퍼스트 맨’은 한국 밖에선 이미 일종의 트렌드가 된 듯하다. 11월 미국 대선에서도 여성 후보가 유력하다. 우리는 어떤가. 필립 메이와 같은 케이스가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성공을 일군 여성들은 싱글인 경우가 많지 않나. 학력·연봉은 물론 신장까지 남자가 여자보다 높아야 한다는 ‘3고(高)’ 원칙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굳건하다(참고로 필립은 구두를 신은 테리사 메이 총리보다 키다 더 작다. 그래도 멋지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남성들만 꽉 막힌 건 아닌 거 같다. 남편 혹은 남자친구 직업을 묻는데 “응, 주부야. 살림하느라 얼마나 바쁜데”라며 싱긋 웃을 수 있는 대한민국 여성은 과연 몇이나 될까.

남성과 여성 모두 딱딱히 굳은 고정관념의 감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암탉이 울어서 잘되는 집안이 나오고,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1호기 트랩을 내려오는 부군이 두루마기 한복 패션을 세계에 선보일 수 있는 날이 올 것 아닌가.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