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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철 택배원'… 택배일지 블로그에 매일 기록하는 택배원 조용문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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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27일. 70대 백발의 노인은 눈을 다시 비볐다. 얇은 편지봉투를 받아들고서다. 서울 지하철 제기역 4번 출구에서 만난 중년의 남성 고객은 “판교역까지 1시간 안에 전해달라”며 노인에게 봉인되지 않은 편지 봉투를 건넸다. 수고비는 1만5000원이었다. 일반 배달비보다 후한 액수다.

”이게 대체 뭐길래…“ 생각하는 순간 봉투 사이로 100만달러짜리 수표가 흘러나왔다. ‘100만달러면… 10억?’ 노인의 이마에선 땀이 흘렀고 심장은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1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지금 생각해도 긴장됩니다.”

지난 15일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만난 조용문(75)씨가 회상하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조씨는 지하철을 타고 물건을 배송하는 지하철 노인 택배원이다. 지하철 노인 택배원 65세 이상 승객은 지하철 요금이 무료라는 점을 이용해 생긴 틈새직종이다. 서울시에서 파악하고 있는 지하철 택배원만 288명이다.

조용문씨는 수많은 택배원들 중에서도 ‘파워블로거’로 유명하다.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 ‘지하철 택배원 블로그’에는 물건을 배달하며 들르는 지하철역 인근의 사람과 조형물, 풍경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히 기록돼 있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그가 게시한 글만 1250여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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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문(75)씨가 2015년 4월 8일 암사역에서 평택역 인근 백화점까지 편지봉투 하나를 장거리 배송한 이후 찍은 사진이다. 사진=조용문씨 블로그

‘중장비가 으르렁거리면서 콘크리트를 부숴버리고 있다. 사람의 나쁜 마음도 이렇게 심리장비를 동원해서 없애고 고운 마음으로 만들어 심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2016년 6월3일 종로3가역에서 포크레인을 보고 블로그에 남긴 글)

조씨 블로그의 방문자 수는 하루 평균 700여명이다.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자 수가 대폭 늘었다. 댓글도 활발하게 달린다. 방문자들은 그가 올리는 소소한 배송일지를 읽고 덧글을 남겨가며 작은 공감과 위안을 얻어간다. 현재까지 누적 방문객 수만 50만명이 넘는다. 그의 블로그에는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네요” ”우연히 들른 학생인데 많은 것을 느낍니다. 항상 건강하세요”라는 댓글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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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가 2013년 3월 19일 피겨여왕 김연아의 귀국 기자회견에 사용될 천막을 인천공항으로 운송하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조용문씨 블로그

조씨가 이토록 기록을 중시하게 된 것은 과거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로 명예퇴직자가 쏟아져 나오던 1998년 조씨도 32년간 몸담았던 한국조폐공사를 떠났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얼마간의 퇴직금과 불량 주화를 일일이 눈으로 확인하며 길러온 꼼꼼함 뿐이었다.

대부분의 명예퇴직자들과 같이 조씨도 퇴직금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다. 2009년 그는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았다. 당시 복용한 수면제가 부작용을 일으켜 조씨는 한때 사랑하는 가족, 직장, 일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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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가 운영하는 `지하철택배원 블로그`. 차범근 3부자가 출연한 약품광고로 인한 소음이 `괴성`같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조용문씨 블로그

어렵게 기억을 되찾은 뒤 그는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했다. ”소중한 추억과 가족들을 다시 잃고 싶지 않았어요. 블로그는 기억을 저장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입니다.”

조씨는 지금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택배로 번 돈을 기부하겠다는 계획이다. “나중에 블로그 방문객 수가 100만명이 넘으면, 100만원을 아동보호기관에 기부할 겁니다” 100만원은 하루 2-3만원을 버는 그에게 100만원은 두 달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는 경복궁역 메트로 전시관에 그의 블로그 글들을 전시하고 싶다는 꿈도 밝혔다. 그 목표를 위해 오늘도 조씨는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고 메모지가 담긴 검은색 크로스백을 멘 채 집을 나선다.

서준석 기자 seo.jun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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