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4)제84화 올림픽반세기<43>여자배구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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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경올림픽이 개막의 팡파르를 울리는 순간(10월10일하오2시) 북한선수단은 니이가따 항에서 소련전세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북한선수단의 철수에 따라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지역예선을 거쳐 여자배구의 아시아대표로 출전권을 따냈던 북한이 불참함에 따라 여자 배구 참가팀은 5개국으로 줄어 6개팀 이상이 출전해야 공식대회를 인정한다는 IOC헌장을 지킬 수 없게 돼 올림픽 배구경기가 유산위기에 빠진 것이다.
더구나 배구는 동경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데다 주최국 일본은 여자배구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다급해진 국제배구연맹은 첫날(10월11일)경기일정을 하루 미루고 아시아예선2위인 한국팀의 출전을 요청해왔다.
63년12월 인도 뉴델리에서 벌어진 아시아예선에서 남자배구는 우승을 차지해 출전권을 따냈으나 여자배구는 북한에 패배, 이미 대표팀을 해체해버린 상황이었다.
올림픽조직위와 국제배구연맹중 「리보」회장으로부터 간곡한 출전요청을 받은 한국선수단은 본국에 급히 연락, 고위층의 허락을 얻은 뒤 대표팀을 급조, 이틀만인 10월11일 동경으로 날아왔다. 비자도 없었고 당시 한국에 취항하지않던 JAL 전세기를 이용했다.
그런데 한국의 여자배구 급조출전은 「일본의 승을 위한 들러리 출전」 「1백만엔 수수설」이란 불쾌한 구설수를 남겼다.
배구경기에서 남자팀은 9전전패, 여자팀은 5전전패로 각각 참가국중 꼴찌를 기록했다. 반면 「동양의 마녀」란 별명이 붙은 일본여자팀은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남자팀도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여자팀이 다섯경기에서 한세트도 따내지 못하고 참패하자 일부에서는 「연습한번 못한급조팀으로 올림픽 경기에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공식경기를 성립시켜 일본팀을 우승시키기 위한 들러리 출전이었다」고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자배구 출전이 국제 스포츠 사회에 한국을 인식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고 더구나 북한이 남기고 간 한민족의 불명예를 깨끗이 회복시킨 스포츠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또 우리 선수단를 괴롭힌 「1백만엔 수수설」도 실상은 근거없는 구설수였다.
시간이 촉박하여 출국해야 했던 여자배구팀(13명)은 당시일본을 취항하던 KA와 NW가 모두 예약이 끝나 난감했다. 이에 따라 선수단은 올림픽조직위에 이를 통고하여 JAL전세기를 배정받게 됐던 것이다.
JAL전세기를 이용함에 따라 우리 선수단은 1백만엔의 추가 비용이 들게 된 것이 금전 수수설의 발단이었다. 우리 선수단은 일본조직위측이 전세기 요금을 부담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귀국후 결제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왜곡, 완전돼「한국이 일본배구협회로부터 1백만엔을 받고 배구팀을 출전시켰다」는 구설수로 번졌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한국선수단이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 동경올림픽은 일본 천황의 개회선언으로 막이 올랐다. 참가국 94개국에 임원. 선수는 7천5백여명. 한국은 최명종코치(레슬링)가 기수가 돼 46번째로 입장했다.
성화를 점화한 주인공은 19세의 와사다대 학생 「사까이 요시노리」였다.
사상 처음 운동선수가 아닌 인물로 성화 최종주자가 된 「사까이」는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바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휩쓸던 날이었다.
일본은 「사까이」의 성화 점화를 통해 평화를 기원하는 인류의 의지를 나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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