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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서 AI 벤처 사들이고 유연한 조직문화 도입 나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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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18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이 이달 7일(현지시간)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 ‘앨런앤드코 미디어 앤드 테크놀러지 콘퍼런스’에서 IBM의 버지니아 로메티 최고경영자(CEO)와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사람은 인공지능(AI) 분야의 협력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

‘2020년 5개 신사업에서 매출 50조원. 고용창출 4만5000명’


삼성은 2010년 5월 ‘삼성의 10년 구상’으로 신수종 사업을 발표하며 이 같은 목표를 제시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주재로 진행된 영빈관 승지원 사장단 회의에서 신사업으로 결정된 투자 대상은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발광다이오드(LED)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 10년 간 23조3000억원을 투자해 반도체 이후 삼성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2020년이 3년 남짓 남은 현재 이 구상은 대폭 수정됐고 주변 상황도 많이 변했다. 당초 6조원을 투자해 매출 10조원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던 태양전지 사업에서 삼성은 2014년 철수했다. LED는 삼성전기에서 떨어져 나와 삼성전자의 한 사업 부문으로 편입된 뒤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의료기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미래 사업에 대한 투자가 전부 성공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업 10개 중 한 두개가 살아남아 20~30개 사업의 몫을 해낸다. 삼성 측은 기존 5대 신수종 사업이 ▶IT·전자 ▶ 바이오 제약 ▶금융의 3대 축으로 재편됐다고 설명한다.


그룹 매출 중 전자 비중 74%6년 전과 비교해 삼성 그룹의 큰 구조엔 변화가 없다. 오히려 삼성전자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삼성그룹의 지난해 매출액 271조8800억원 중 삼성전자(200조6530억원)가 차지하는 비중은 74%에 달한다. 나머지 58개 계열사의 매출을 다 합쳐도 삼성전자 매출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물론 삼성전자는 현재 가장 경쟁력 있는 정보기술(IT) 업체 중 하나다. 자체 생산하는 부품과 소프트웨어로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전자업체다. 삼성전자는 올 2분기에 매출 50조원, 영업이익 8조1000억원의 실적을 냈다고 7일 공개했다. 이 실적의 55%는 스마트폰에서 나온다. 올 3월 출시된 갤럭시S7이 2분기까지 1500만 대가 팔렸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이 포함된 IM(IT·모바일) 부문에서 4조3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것으로 분석한다. TV를 포함한 소비자 가전 부문에서 1조 이상, 반도체 부문에서 2조6000억원을 벌었다. 반도체-휴대전화-가전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가 단단해 한 두 부문의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도 다른 부문이 받쳐주는 모양새다.


문제는 70년대 씨앗을 뿌린 사업 분야들이 여전히 삼성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 보이지 않아 스마트폰이 안 팔리면 그룹 전체가 휘청일 수 있는 취약 구조다. 황민성 삼성증권 연구원은 “전자의 좋은 실적으로 투자 여력이 생기면서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며 “어물어물하다 중국 업체에 따라 잡히면 삼성전자 자체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만 그룹 전체로는 침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수종 사업 가운데서는 바이오 부문이 바이오시밀러(복제약)로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상장을 추진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현재 1·2 공장을 가동중이다. 제3 공장이 완공되는 2018년엔 연 36만L 생산 능력을 갖춘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분야 세계 1위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2000억원대의 영업손실이 났지만 2020년에는 매출 1조원에 영업 이익률 30~40%를 기대하고 있다.


사물인터넷 API 개방하고 비야디에도 투자 삼성이 미래 사업으로 투자하고 있는 대표적 분야는 사물인터넷(IoT)이다. 이를 위해 그룹 전체가 함께 움직여왔다. 2014년엔 IoT 플랫폼 기업 스마트싱스를 인수했다. 삼성전자는 24시간 켜져 있는 냉장고를 IoT 허브로 삼은 스마트홈을 선보이고 있다. 침대 매트리스 밑에 두는 슬립센스도 IoT 허브로 검토중이다. 사용자의 맥박·호흡·동작을 수집해 잠들면 TV를 자동으로 끄고 수면 패턴 등을 파악해 최적의 실내 환경을 유지하는 식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IoT 확산을 위해 지난해 11월 표준화된 API를 개방했다. API는 제품에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소프트웨어 접근통로다. 다른 기업도 공개 API를 통해 삼성전자 제품으로 IoT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품이나 응용 프로그램(앱)을 개발할 수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020년까지 전 가전 제품을 IoT로 연결한다는 목표”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삼성은 세계 AI 기업 인수합병(M&A)의 4대 ‘큰 손’ 중 하나다. 삼성벤처투자는 지난 5년간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금액을 실리콘밸리의 AI 스타트업에 쏟아부었다. 삼성벤처투자는 1999년 삼성그룹 차원의 성장동력 육성을 위해 세운 투자회사로 삼성전자와 삼성SDI·삼성전기·삼성증권·삼성중공업이 대주주다.


지난해엔 소셜네트워킹이 가능한 인공지능(AI) 로봇 회사 지보(JIBO)에 약 200억원을 투자했다. 지보 외에도 비캐리어스·킨진·이디본·말루바 등 AI 부문에서 떠오르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이 구체적인 투자 건수와 금액을 밝히지는 않지만, 업계에선 10곳 이상의 AI 스타트업에 수억 달러를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이 미래엔 ‘궁극의 스마트 디바이스’인 자율주행 스마트카 등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올들어 전장사업팀을 신설했고, 시스템반도체(삼성전자), 카메라 등 부품(삼성전기), 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 배터리(삼성SDI) 등 마음만 먹으면 자동차 사업을 할 수 있는 자산을 충분히 갖고 있다. 또 중국 전기차 붐을 이끌고 있는 비야디(BYD)와 전기차용 반도체·부품을 함께 개발하기 위해 유상증자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정확한 투자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5000억원 상당이라는 관측이다.


스마트카는 스마트폰과 비슷하게 모터·배터리·전자장비 등 부품을 모아 조립하는 방식이어서 삼성이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다. 동시에 자율주행을 가능하게 하는 빅데이터와 운영체제(OS)를 지배하는 구글, 기기와 플랫폼의 완벽한 일체화가 강점인 애플 등 글로벌 업체와 승부를 내야 하는 분야라 그만큼 부담도 크다. 황 연구원은 “자동차 시장 규모는 줄고 있고 우버와 같은 형태로 공유경제도 활성화되고 있어 실제로 돈을 벌 수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며 “완성차보다는 부품쪽으로 진출을 시도할 것”으로 내다봤다.


도쿄 구상·신경영 선언 넘어설 변화 필요60~70년대엔 해외, 특히 일본에서 잘 되는 사업을 한국으로 가져오면 됐다. 이병철 회장의 ‘도쿄 구상’이 이런 성격이었다. 리더가 될만한 사업을 잘 포착하고 성실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성공을 일궜다. 이건희 회장은 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1류가 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며 변화를 주문했다. 신경영 덕분에 삼성은 반도체·TV·휴대전화 등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젠 해외에서 가져 올 새 사업도 없고, 따라할 선도 기업도 많지 않다. 투병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 일선에 나선 지 2년이 지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다.


전문가들은 ‘관리의 삼성’이라는 경영 패러다임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는 “수시로 상황이 변하는 시대에 사업 단위로 새 먹거리를 찾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환경 변화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리더의 톱다운 방식의 비전 제시는 틀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80년대 탄생한 기업이 100억 달러 기업으로 크는데 20년이 걸렸지만 스냅챗은 생긴지 2년만에 상장도 하기 전인데 기업가치가 200억 달러”라며 “유연하면서도 민첩한 조직만이 창조적인 신수종 사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삼성은 올 3월 직급 단계를 줄이고 수평적 조직문화를 도입하는 ‘컬쳐 혁신 운동’을 시작했다. 지난달 21일에는 사내 방송을 통해 “삼성의 소프트웨어 부문 인력 절반이 실력 부족”이라고 짚었고 1주일 뒤엔 “부장이 만든 소스코드의 오류를 사원이 자유롭게 지적하지 못하는 경직된 조직문화를 바꾸지 않는 한 경쟁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움직임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사업부문별 고과와 인센티브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부문간 협업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는 “분야별 연결만 잘 되면 세계를 압도할 ‘보물’이 내부에 있는데 단기 성과를 챙기느라 이를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직원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엉뚱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최고 경영진부터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시각을 버려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 연구원은 “한국에서 태어난 기업이지만 지분 구조로 보나 지역별 매출로 보나 이미 글로벌 기업”이라며 “한국에서 소프트웨어가 안된다면 해외 인재를 활용하고 중국의 유능한 엔지니어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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