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산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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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9면

비 내리는 산사는 아름답다. 문을 열고 마당에 빗물 떨어지는 모양만 보아도 자연과의 교감이 된다. 저절로 명상에 빠진다. 비 갠 후의 산사는 더욱 아름답다. 먼 계곡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산자락을 휘감아 돌면 그 사이로 신령스런 기운이 퍼져 나온다. 이 산수화 같은 풍경 속에 뒷짐을 지고 산을 마주한 채 떡 하니 서 있으면 마치 온 산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출가의 길이 흡족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리 좋은 산사 생활을 나는 오래 하지 못했다. 수도생활을 하느라, 수도에서 쩔쩔매며 살았다. 수도 서울에 사는 승려를 ‘수도승’이라 부르는 은어가 생긴 건 아마도 우리 같은 ‘수도승’ 때문이리라.


지금도 여전히 수도승인 나는 요즘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 듣기에 빠져있다. 휴대전화를 연결해서 듣는다. 문제는 크기가 내 주먹보다 작은 스피커라 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답답함을 느낄 때마다 ‘좀 큰 걸 하나 장만할까?’ ‘아니야, 또 짐을 만들면 안 되지’하며 이런저런 갈등에 빠지곤 한다.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마음보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앞서는 바람에 늘 이렇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곤 한다. 수행이 필요한 수도승인 게다.


그러나 여기에 구차한 변명을 더해보자면 이렇다. 불교방송에서 클래식 음악프로를 진행한 지 몇 년이 흘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음악을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잘 모르는 것과는 별개로 언제부터인지 음악을 듣지 않으면 수분을 섭취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약간 마른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매일 산을 보지 않고도 끄떡없이 살 수 있을 정도로 깍쟁이 수도승이 되었는데 말이다. 희한하게도 음악을 듣지 않고선 어딘지 모르게 인생이 팍팍해지는 것 같다. 음악이 산도 보여주고 강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하하. 쓸데없이 업(業)만 쌓여 가는가 보다.


비 갠 오후 산책길에 나섰다. 사실 요 며칠 심기가 편치 않았다. 약간 음울한 날씨 탓인지 얼마 전 먼 길 떠난 벗의 마지막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려서다. 산책길 나서길 잘했다. 내 마음과는 달리 비 갠 뒤의 거리 풍경이 산뜻했다. 공기가 좋아서인지 차들의 소음도 오늘은 들어줄 만했다.


부처님 말씀 중에 “열반의 길로 가는 너는 남루한 옷도 마음에 들 것이고, 빌어서 먹는 밥도 맛있을 것이며, 나무 아래 앉아도 마음은 늘 즐거울 것이다”라는 글이 있다. 과연 벗은 그 짧은 생을 그리 살다 갔을까? 산책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가사 한 자락 덮고 떠난 마지막 길, 그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쓸쓸해졌다.


또 비가 내린다. 토닥토닥 내린다. 산사의 풀벌레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아닌데도 좋다. 빗소리 들으며 잠들기엔 꽤 괜찮은 여름밤이다. 오늘은 빗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고운 꿈길로 이끌어주려나 보다. 내 열반의 길도 이러했으면.


원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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