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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라면 끓이기보다 쉬운데…운전 배우면서 장 담그기는 왜 안 배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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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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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밥 한 상을 뚝딱 차려놓은 고은정 우리장아카데미 대표. 그는 이 시대의 기미(氣味)상궁을 소망한다. 조선시대 왕의 밥상을 살폈던 기미상궁처럼 21세기 건강한 음식문화를 꿈꾼다. [남원=프리랜서 오종찬]

손이 빨랐다. 싱그러운 밥 한 상을 금방 차려냈다. 두부와 함께 지은 쌀밥, 시원한 열무김치, 매콤한 산갓물김치, 담백한 감잣국, 짭조름한 강된장, 푸르른 상추쌈 등 소쿠리에 여름을 가득 담아 왔다. 사실 폐를 끼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도착 시간이 정오 어름, 딱 점심때가 아닌가. ‘밥의 전도사’를 만나러 가는 길, 눈 딱 감고 도착 1시간 전에 문자를 넣었다. “조금 후에 뵐게요.” 소식을 늦게 받았는지 40여 분 후에 짧은 답신이 왔다. “앗! 네;;”

‘밥 짓기 운동’10년 고은정 우리장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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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맛있는 부엌’ 주방 앞에 걸린 서각 작품.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의 시를 옮겼다.

지난 8일 전북 남원시 산내면.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3시간 반을 달려 실상사 앞에서 내렸다. 지리산 초록빛이 절정이다. 사찰 건너편 ‘맛있는 부엌’을 찾아갔다. 주인장 고은정(57)씨가 황급히 객을 맞았다. “있는 반찬 그대로 내놓았어요. 마침 냉장고에 언 두부도 있고 해서….”

고씨가 오이소박이를 쭉쭉 찢어 주었다. “칼이 들어가면 맛이 덜하잖아요. 하하하.” 화장기 없는 민낯에 편하게 걸친 옷, 이웃집 누님을 만난 듯했다.

“먹고 남은 식재료를 어떻게 쓸까, 평소 생각을 많이 합니다. 두부밥도 그래요. 두부가 얼면 공기구멍이 생기고 푸석푸석해지죠. 거기에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밥을 했더니 애들도 잘 먹더라고요.”

고씨는 밥심을 믿는다. 한국 음식의 처음과 끝이 밥이라고 여긴다. 그가 최근 펴낸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은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밥짓기 안내서다. 양념장 하나만 있으면 한 끼 실하게 먹을 수 있는 밥을 계절별로 추렸다. 요리는 넘치고, 맛집은 붐비고, 셰프는 스타로 떠올랐지만 막상 밥은 홀대받는 시대,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내가 지은 밥”이라고 목청을 돋운다.

매일 먹고 사는 밥이 아닌가요.
“맛있는 밥에 정답은 없죠. 그런데 요즘엔 대충 해 먹고 살지 않나요. 전기밥솥에 오래 놓아두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즉석밥으로 때우곤 하죠. 자동차 운전이나 자전거 타기는 배우면서 왜 밥 짓는 법은 소홀히 할까요. 한번 몸에 익으면 평생 가는데 말이죠. 밥상을 점검해 볼 때입니다.”
모두 바쁘게 살기 때문이겠죠.
“삼시 세끼 새로 지을 순 없겠죠. 그래도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해요. 밥도 요리이거든요. 밥이 주식인 나라에서 언제부턴가 밥의 위대함을 잊어 버렸어요. 예컨대 갓 지은 밥을 바로 냉동고에 나눠 담고, 나중에 해동해 먹으면 편의점 즉석밥이 부럽지 않습니다.”
밥짓기의 기본을 꼽는다면요.
“밥은 쌀과 물과 불이 만나는 3중주의 예술입니다. 물론 쌀이 가장 중요하죠. 가능한 한 적게 구입하는 게 좋아요. 쌀은 도정하는 순간부터 노화·산화가 시작되거든요. 도정한 쌀은 2주 이내에 먹어야 하고요. 국내엔 약 300종의 쌀, 2000종의 브랜드가 있는데 혼합품종보다 단일품종을 권합니다. 그래야 밥맛이 균일해요.”
젊은이들은 빵을 좋아합니다.
“365일 빵이나 피자를 먹고 살 수 있을까요. 화려하지 않지만 질리지 않고, 몸에도 좋은 게 밥이죠. 밥을 짓다 보면 삶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쌀을 씻고, 물을 붓고, 불을 올리고, 상을 차리고, 그것만한 감동도 없어요. 밥 생각만 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와요. 솥뚜껑을 여는 순간의 떨림과 설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죠.”
계절별 밥상이 각기 새롭습니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혼자 먹는 ‘혼밥족’도 눈에 띄고요.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한 끼 누릴 수 있는 레시피를 모아 봤어요. 밥이 보약이라고 했죠. 조선시대에는 90여 가지의 밥이 있었다고 해요. 요즘처럼 흰쌀밥에 매달리지 않았어요. 나물·해물·육류를 넣어 밥을 짓고, 들기름과 간장으로 밑간을 하면 향과 감칠맛이 풍성해져요.”

고씨는 하루하루가 바쁘다. 본거지는 지리산이지만 전국을 무대로 뛴다. 밥과 장(醬), 김치 세 가지를 들고 식탁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외식·매식, 공장식품에 포위된 밥상의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 우리장아카데미 대표, 약선(藥膳)식생활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2007년 이곳으로 내려왔다. 귀농 전부터 몸에 약이 되는 약선음식, 기초 한의학을 독학했고, 2005년 원광디지털대 한방건강학과에 들어가 이론과 실기를 다졌다. 『집 주변에서 찾는 음식보약』 『장 나와라 뚝딱』 등을 내며 우리 맛 살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서울 생활을 왜 접었나요.
“전교조 활동도 하고, 학교를 못 나온 주부도 가르치고, 아이들 학원도 운영했는데 사람에 치였는지 몸이 많이 아팠어요.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렸죠. 도시 패배자라고 할까요. 고향이 강원도 춘천 산골인데, 젊어서부터 시골에 내려가야지, 내려가야지 되뇌었어요.”
식생활 운동가로 이름이 높습니다.
“1년 365일 중 300일 가깝게 외부 강연을 다닙니다. 1년에 1만 명 넘게 만나는 것 같아요. 2009년 발족한 식생활교육국민네트워크가 지역별로 구성돼 있거든요. 음식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욕구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증거죠. 지자체·민간단체·학교 가리지 않고 찾아갑니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죠. 이왕이면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뜻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간장·된장·고추장도 그래요. 공장에서 만든 장류(醬類)는 식용유를 만들고 남은 탈지대두를 원료로 쓰는 경우가 많아요. 첨가물도 여럿 들어가고요. 유기농이니 뭐니, 식재료는 비싼 걸 사면서 막상 맛을 내는 장(소스)은 공장 것을 쓰면 되겠어요.”
장을 담그려면 손이 많이 갑니다.
“현대인이 옛날 식으로 살 순 없겠죠. 그럴 필요도 없고요. 일일이 메주를 쑤고, 소금을 만들 일 있나요. 재료만 좋은 것으로 구입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쉬워요. 메주에 소금물만 부으면 반은 끝난 거죠. 메주 1말에 물 20L, 소금 3.5㎏ 정도가 적당합니다. 평소 ‘장 담그기는 라면 끓이기보다, 불고기 재기보다 쉽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번거롭지 않을까요.
“연초에 한 번만 담그면 1년을 잘 보낼 수 있는데요, 뭘. 고추장도 메줏가루·고춧가루·조청만 있으면 됩니다. 지난 3·1절부터 ‘올해의 장’ 운동을 시작했어요. 서울·포천·안동 등에서 200여 명이 참여했죠. 첫 행사 치고는 반응이 좋아요. 11월 말 포천 서운동산에서 품평회를 열 계획입니다.”
그래도 한계가 있을 듯합니다.
“방송인 유재석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요. 영향력이 커질 테니까요. 한때 유씨를 미워했습니다. 애써 전통음식을 알려 왔는데 그가 TV 예능프로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 만든 요리를 맛있다고 칭찬하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거든요.”(웃음)
음식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요.
“저는 뛰어난 요리사도, 식품전문가도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대물림받은 손맛을 요즘에 맞게 계량화·간소화했다고 보면 돼요. 골목골목에 장이 익어 가고, 밥 향기가 풍기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밥상은 무엇보다 나누는 겁니다. 방방곡곡에 동네부엌을 만들고 싶어요. 식사를 거르는 농촌 노인이나 도시 취약계층을 위해 공동취사를 하는 거죠. 그게 최종 목표입니다.”
[S BOX] ‘비벼 먹는 삼계탕’ 닭고기 영양밥, 여름철 기력 회복에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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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더위를 달래는 데 좋은 밥들. 쌀과 함께 다양한 재료를 넣어 지을 수 있다. 왼쪽부터 녹차해물밥·치자밥·두부밥·보리밥·닭고기영양밥. [사진 세종라이프]

열무는 ‘여름에 먹는 인삼’으로 불린다. 성질이 차 여름철 뜨거워진 속을 다스리는 데 제격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지친 날에는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고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삼복더위도 금방 이겨낼 것 같다. 보리에 감자를 넣고 밥을 지으면 단맛이 더욱 풍부해진다.

고은정씨의 밥상철학 1조 1항은 제철 음식이다. 밥도 절기를 따라야 몸에 이롭다고 믿는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꼽는 여름 나기 밥은 닭고기 영양밥이다. ‘비벼 먹는 삼계탕’이라고 표현했다. “삼계탕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즐겨 먹을 수 있어요. 찬 음식을 자주 먹다 보면 몸속도 차가워져 면역력이 떨어지기 쉽죠. 잃어버린 기력을 되찾는 데 이만한 밥도 없어요.”

조리법도 간단하다. 한입 크기로 썬 닭고기 살을 불린 쌀과 찹쌀 위에 얹고 밥을 하면 된다. 깨끗이 씻은 인삼과 대추도 준비한다. 물을 부을 때 고기에 간이 배도록 소금을 조금 넣고 고기 냄새를 없애기 위해 청주를 고루 끼얹으면 더욱 좋다.

고씨는 이번 책에서 여름에 어울리는 밥 여섯 가지를 소개했다. 상추쌈과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보리밥, 몸에 쌓인 열을 내려주는 치자밥, 바다의 향기를 품은 녹차해물밥, 카레라이스 뺨치는 된장덮밥, 양념된장(뽀글이장)에 비벼 먹는 두부밥 등이다. 그간 쌓아온 그만의 노하우를 집약했다.

“복잡할 게 하나 없어요. 밥만 지을 수 있으면 뚝딱 한 그릇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일단 해보시라니까요.”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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