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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름기행] 제주의 땅끝에서 해녀의 바다를 내려다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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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오름기행 ⑧ 지미봉

하도리 쪽에서 바라본 지미봉. 곡선이 매끄러운 잘 생긴 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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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처럼 둥글넓적한 제주도를 놓고 머리와 꼬리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먼 옛날 누군가는 그런 상상을 했다. 섬에 시작점과 끝점을 찍었고, 그 점이 오늘도 지명으로 내려온다. 제주도 서북쪽 끄트머리의 두모리(頭毛里·제주시 한경면)가 섬의 머리가 되는 땅이고,

남동쪽 해안에 우뚝 선 오름 지미봉(地尾峰)이 섬의 꼬리가 되는 지형이다. 지미봉이 들어선 땅의 이름은 ‘이윽고 끝나는 땅’ 종달리(終達里·제주시 구좌읍)다. 섬 머리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오지 않지만, 섬 꼬리에 관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내려온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제주올레도 지미봉을 끝으로 422㎞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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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오름 vs 내다보는 오름

 제주 오름은 아마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 바라보는 오름과 내다보는 오름. 바라보는 오름은 멀찍이서 자태를 감상하는 오름이다.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처럼 분화구를 그대로 드러낸 성산일출봉을 비롯해, 한라산 기슭의 윗세오름, 관능적인 곡선을 뽐내는 용눈이오름, 거대한 벽처럼 서 있는 산방산, 정삼각형을 이루는 다랑쉬오름 따위가 대표적인 바라보는 오름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같이 주변을 압도하는 풍경을 연출하는 오름이다.

지미봉 정상의 풍경. 눈 앞에 거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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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면에 내다보는 오름은 정상의 조망이 빼어난 오름이다. 군산에 오르면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보이고, 송악산에 오르면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해질 녘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 제일의 석양을 내 것인 양 차지할 수 있으며, 이른 새벽 둔지봉에 오르면 때 묻지 않은 제주 중산간의 속살을 한껏 훔쳐볼 수 있다. 정상 산행의 품을 팔아야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보장하는 오름이다.

 그렇다고 바라보는 오름과 내다보는 오름이 홀수와 짝수처럼 나뉘는 것은 아니다. 멀찍이서 바라만 봐도 좋은 오름 중에는 정상에서 내려다봐도 좋은 오름이 많다. 이를테면 지미봉이 그러하다. 지미봉은 제주도 역사에서 제주의 땅끝을 의미하는 오름이지만, 여행자 입장에서는 제주 역사를 몰라도 여행의 목적으로 삼을 만한 오름이다. 오르지 않아도 좋고, 오르면 더 좋은 오름이다.

북쪽 입구에서 시작한 지미봉 산행. 30분만 오르면 정상에 다다른다. 의외로 숲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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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미봉의 해발고도는 166m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코 낮은 오름이 아니다. 어느 방향에서든 지미봉은 두드러져 보인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산방산(507m)이나 다랑쉬오름(382m)에 버금간다. 두 봉우리를 꼭짓점으로 삼은 채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직선으로 돋은 지미봉은 밋밋한 주변 풍광을 단번에 제압한다. 이유가 있다. 지미봉은 바다와 바투 붙어 있다. 지미봉의 비고가 160m다. 고도와 비고의 차이가 겨우 6m다. 고도와 비고의 차이가 작다는 건, 오름이 해안과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지미봉에서 내려오면 바로 종달 포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미봉은 억지로라도 올라야 하는 오름이다. 오름치고는 경사가 가파른 편이지만, 30분만 작정하면 정상에 다다른다. 탐방로도 말끔하게 정비돼 있다. 북쪽 탐방로가 남쪽 탐방로보다 훨씬 순하다. 북쪽 탐방로는 숲을 헤치는 맛이라도 있지만, 남쪽 탐방로는 계단만 바라보고 걸어야 한다. 제주올레 21코스도 지미봉 북쪽에서 올라 남쪽으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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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에서 가장 가까운 오름 말미오름(두산봉). 제주올레 1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말미오름이 제주올레 맨 마지막 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지미봉과 가까이 서 있다.

정상에 서면 소위 360도 전망이 펼쳐진다. 동쪽을 바라보면 눈앞에 우도가 길게 누워 있다. ‘소가 누운 섬’ 우도의 온전한 꼴이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 지미봉 정상이다. 우도에서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성산일출봉이 내다보인다. 수면과 나란한 해안 마을을 배경으로 독보적으로 솟은 성산일출봉은 견고한 성채와 같은 위엄을 내뿜는다. 시선을 뭍으로 돌리면 중산간 오름밭의 전경이 펼쳐진다. 맨 앞에 서 있는 오름이 두산봉, 즉 말미오름이다. 제주올레 1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오름 말이다. 제주올레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오름이 사이좋게 곁을 지킨다. 운이 좋으면 올록볼록 돋은 오름들 뒤로 한라산의 거대한 실루엣이 그려진다.

지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우도. 소가 누운 꼴의 섬 우도가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이 지미봉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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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 정상의 조망을 조목조목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지미봉 정상의 전망은, 360개가 넘는다는 제주 오름의 정상 전망 중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것이다. ㈔제주올레도 올레길이 지나가는 20여 개 오름 중에서 지미봉의 전망을 제일 먼저 꼽는다. 정상에 서면 오름에 ‘봉(峰)’ 자를 붙인 이유도 알 수 있다. 남산봉·사라봉·서우봉 등 옛날 봉수가 있던 오름 대부분이 ‘봉 자 돌림’ 오름이다. 지미봉 정상에 봉수대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지미봉 정상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 일대 전경. 지미봉 정상은 성산일출봉이 가장 예쁘게 보이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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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미봉이 서 있는 자리는 옛날 섬이었다. 오롯한 섬은 아니었고 물이 빠지면 뭍과 이어지는 모래펄이었다. 지미봉 북쪽 하도리 철새도래지의 습지가 옛날 바닷물이 들고 나던 물길이었다. 그 물길을 따라 펼쳐진 모래밭에 16세기 염전이 들어섰다. 이른바 ‘종달 염전’은 제주 제염의 효시다. 하나 종달 염전은 뭍에서 건너온 값싼 소금에 밀렸고, 소금밭이었던 모래밭은 100년쯤 전 농지로 변신을 감행했다. 둑을 쌓고 바닷물을 막아 논을 들인 것이었다. 간척사업의 결과 지미봉을 에워싼 종달리 땅은 엄연한 육지로 거듭났다.

 그러나 농지로의 변신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제주도 최초의 간척지였지만, 지반이 튼튼하지 못해 논에서 자꾸 바닷물이 올라왔다. 벼는 말라 죽었고, 논은 다시 소(沼)가 되었다. 소에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도 일어났다. 당시 간척사업을 주도한 인물이 대정군수를 지낸 채엄석(1850∼1920)이었는데, 종달리 사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데다 사람만 잡아먹는 소를 ‘대정놈의 소’라 부르며 비아냥댔다.

세월이 흘러 그 대정놈의 소 대부분은 들이 되었고, 하도리와 종달리를 잇는 물길만 소로 남았다. 인간에게 내팽개쳐진 소에 언제부터인가 철새가 내려앉았다. 하도리 철새도래지는 그렇게 시작됐다. 현재 철새도래지의 둘레는 약 3700m에 이른다. 한때는 세계적 희귀종 황새가 관찰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도리 철새도래지에는 멸종위기종 저어새를 비롯해 도요새·청둥오리 등 20여 종의 철새가 날아든다. 하도리는 제주도 유일의 탐조 관광지다.

해녀의 바다

물질 중인 하도리 해녀들.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러 나선 하도리 해녀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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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 조망이 빼어난 이유는 바다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해안을 에두른 에메랄드 물빛 때문이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다에는 그러나 서러운 역사가 배어 있다.

제주도 지도를 보자. 섬의 북동쪽 모퉁이에 제주시 구좌읍이 들어서 있다. 해안을 따라 북쪽에서부터 구좌읍에 속하는 동복·김녕·월정·평대·세화·하도·종달 마을이 차례로 이어지고, 종달 아래로 서귀포시 성산읍의 시흥·오조·성산·신양 마을이 늘어서 있다. 이 일대 해안선은 렌터카 여행자에게도 익숙한 길이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가 이 해안선을 따라 들어선 해안도로다. 제주 연안 바다가 곧 해녀의 바다라지만, 이 해안을 들고 나는 바다야말로 제주 해녀의 친정과 같은 바다다.

 제주도에는 현재 4377명의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이 중에서 60.7%인 2658명이 섬 동쪽 해안 마을 출신이다(제주도청, 2015년). 동쪽 해안 마을에서도 구좌읍이 867명으로 해녀가 가장 많고, 구좌읍에서도 하도리가 가장 많다. 하도리 향토사학자 고영봉(66) 선생의 설명이다.

 “하도리는 제주도에서 해안선이 가장 긴 마을입니다. 6.3㎞나 이어지지요. 하도리 해안은 유독 굴곡이 심하고 바다가 얕습니다. 해녀가 물질하기에 좋은 바다이지요. 제주 해녀는 마을 어촌계에 속합니다. 마을이 공동으로 연안 바다를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해녀는 자신의 어촌계 바다에서만 물질을 할 수 있습니다. 옆 마을 바다에 들어갔다가는 싸움이 납니다. 현재 하도리 어촌계원 숫자는 500명이 넘습니다. 그래서 하도리 해녀가 500명이라고들 하지요. 하나 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는 260명 정도입니다. 섬의 어지간한 읍·면보다도 해녀가 많습니다.”

 하도리는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마을이다. 섬에서 해안선이 가장 긴 마을이기도 하지만, 백록담에서 가장 먼 마을이기도 하다. 하도리는 해안을 따라 마을이 들어앉아 있어 ‘웃뜨르’라 불리는 들판도 없고 비가 내려야 물이 흐르는 ‘건천’도 없다. 그 흔한(!) 오름도 없다.

그래도 하도리는 아쉬울 것 없는 마을이다. 미역·몸(모자반)·우뭇가사리·톳·감태 등 해초가 널린 바다를 길게 두른 마을이고, 사시사철 샘물이 솟는 용천수 20여 곳을 거느린 마을이다. 그러니까 하도리는 화산섬 제주도의 포구마을이라기보다는 다도해 작은 섬의 갯마을을 닮은 마을이다. 제주도에 있는 어촌체험마을 6곳 중에서 하도리가 제일 잘 된다. 하도리(下道里)라는 이름은 ‘도이탄’이라 불리던 옛 모래밭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도리가 제주 역사에서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1932년 1월 섬을 뜨겁게 달궜던 제주 해녀항쟁은 하도리 해녀의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 하도리 해녀들이 한 손에 호미, 다른 손에 빗창(해녀가 전복 따위를 딸 때 쓰는 기구)을 들고 오일장에 모여들었다. 오일장에서 다른 마을의 해녀와 합세한 하도리 해녀는 집회를 열어 수탈을 일삼는 일제와 해녀조합의 만행을 성토했다. 닷새 뒤에는 1000명이 넘는 해녀가 세화 오일장에 집결했다. 이번에는 제주도사로부터 해녀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러나 막상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해녀 시위는 1월 내내 이어졌다. 연인원 1만7000명의 해녀가 시위에 참가했다지만 주동자들이 검거되면서 제주 최대의 항일 운동은 막을 내렸다.

 제주 역사에 무심한 사람이 흔히 품는 의문이 있다. ‘왜 해남(海男)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해남은 있다. 아니 있었다. 옛날 물질하는 남자는 ‘포작’이라 불렸다. 포작이 있던 시절에도 해녀는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잠녀’라 불렸다. 포작과 잠녀는 함께 물에 들어갔다. 다만 역할은 달랐다. 포작은 전복·소라 따위를 따고, 잠녀는 미역·톳 따위를 뜯었다. 전복을 따려면 멀고 깊은 바다까지 나아가야 했고, 미역은 가깝고 얕은 바다에서도 캘 수 있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의 물질은 나뉘었다.

 전복은 진상품이었다. 말린 전복이 수라상에 오르면서 공물의 압박이 거세졌다. 조선 후기 양반사회도 전복을 귀히 여겼다. 말린 전복은 권력층이 주고 받는 뇌물이자, 몇 배 부풀린 값으로 되파는 재테크 수단으로 쓰였다. 제주에서 아무리 전복을 갖다바쳐도 육지에서는 더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조정은 전복 공물의 물량과 시기를 일방적으로 정했고, 포작이 물량과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법에 따라 처벌했다. 가장 일반적인 처벌이 태형(笞刑)이었다. 제주의 남자는 곤장을 맞아가며 바다로 나갔다.

 조정은 섬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비바람이 들이쳐도 바다가 험해져도 물량은 달라지지 않았다. 참다 못한 제주 남자는 고향을 버렸다. 돛단배를 타고 몰래 바다를 건넜다. 그렇게 그들은 뭍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포작의 엑소더스(Exodus)가 이어지자 조정은 제주 사람의 육지 출입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1629년에 내려진 금지령은 1823년까지 무려 2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전복을 받아먹겠다고 나라가 백성을 섬에 가둔 셈이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참혹한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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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할망이 물질을 나오면 해녀의 남편인 할방이 바닷가에 나와 할망을 기다린다. 할망이 바다에서 잡은 것을 할방이 집까지 옮겨다 준다.

 남자들이 도망친 제주에는 여자들만 남았다. 그래도 공물의 압박은 잦아들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여자도 먼바다로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제주 바다에 여자만 남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해녀 사이에 내려오는 속담 하나를 소개한다. ‘여자로 나느니 쇠로 나주(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지).’ 해녀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왔다.

 지미봉 정상에 서면 발 아래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노랗고 빨간 점도 보인다. 바다에서 해녀의 지친 육신을 받쳐주는 ‘테왁’이다. 테왁이 보이면 해녀가 있다는 뜻이다. 테왁을 발견했으면 한동안 귀를 기울일 일이다. 휘이휘이, 바닷바람을 타고 숨비 소리가 먼 나라의 소식처럼 들려올 터이다. 혼자라면 울어도 좋다. 세상의 모든 땅끝은 서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 여행정보=지미봉은 입구가 세 개 있다. 북쪽 철새도래지 쪽, 남쪽 둘레길 쪽, 동남쪽 종달 포구 쪽에 입구가 나 있다. 대부분 주차장이 있는 남쪽에서 올랐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지만, 북쪽으로 올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제일 편하다. 지미봉 정상의 조망은 포기하기 힘들지만, 30분 산행이 힘들면 오름 둘레를 돌아서 걸을 수 있다. 지미봉 남쪽 기슭의 둘레길도 걷기에 좋은 길이다. 하도 어촌체험마을(hado.seantour.com)은 체험 프로그램이 다채롭다. 얕은 바다에서 보말·게·거북손 등을 잡는 바릇잡이 체험(5000원), 갯바위 구멍에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우는 대나무구멍낚시체험(1만원), 해녀와 함께 바다에 들어가는 해녀물질체험(2만원) 등이 인기 프로그램이다. 예약 필수. 064-783-1996. 해녀박물관(haenyeo.go.kr)도 가보시라 권한다. 의외로 볼거리가 풍성하다. 064-782-9898. 제주올레 21코스가 해녀박물관에서 시작해 지미봉 아래에서 끝난다. 해녀가 운영하는 ‘석다원’ 식당이 해안도로변에 있다. 해산물 한 접시 2만원, 성게해물칼국수 8000원. 064-784-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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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변에 있는 해녀의 집 ‘석다원’의 대표 메뉴 해물칼국수와 해물파전, 해물 한 접시.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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