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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AIIB에 4조원 투입하는데 부총재 자리 날려버리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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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가 우방인 미국의 견제를 감수하면서 힘겹게 확보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 자리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AIIB가 한국 몫으로 운영되던 최고리스크책임자(CRO) 직위를 국장급으로 격하시키고 기존 국장급이던 최고재무책임자(CFO) 자리를 부총재직으로 격상시킨 뒤 공모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실은 8일 AIIB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됐다. 후보자는 오는 29일까지 모집한다.

AIIB는 중국 주도하에 아시아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가의 도로·철도·항만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 건설자금을 지원하는 국제 금융기구다. 중국이 설립을 주도하면서 미국·일본이 물밑에서 거세게 견제했지만 세계 경제 규모 2위로 떠오른 중국의 위력에 따라 영국·프랑스·독일을 비롯해 57개국이 초대 멤버로 가입했다. 한국은 분담금 37억 달러(약 4조3000억원)를 내고 지분율 5위를 기록했다. 이에 대한 기여로 5개 부총재 가운데 하나를 얻어 AIIB의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CRO 담당 부총재였던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대우조선해양 지원과 관련된 서별관 회의 내용을 공개한 뒤 책임 공방에 휘말리자 지난달 말 돌연 휴직계를 내고 잠적했다. 그러자 AIIB는 곧바로 한국의 부총재 몫을 없앴다. 이 과정에서 정부 대응은 안이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인이 후임이 될 수 있게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미 프랑스인이 새로운 부총재로 내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AIIB에는 4조원이 넘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그만큼 정부는 즉각 이의를 제기하고 빼앗긴 부총재 자리를 되찾아올 수 있도록 AIIB와 중국 당국에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급기야 나라 망신까지 시킨 낙하산 인사의 파국이란 점에서 홍 부총재 지명 과정에 대한 청와대와 정부의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또 그의 임명에 관여한 관계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도 뒤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황망해하는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