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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개인의 책임을 묻는 비극(悲劇)’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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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어서 죽였다’는 피의자의 주장 속에 담겨진 ‘사회적 약자’의 분노… “성(性) 대결이 아닌 시민적 책임감으로 해결해야”

“모두가 공범이고 피해자다”

5월 17일 새벽 1시20분경 서울시 강남구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의 공용화장실에서 23세의 여성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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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34) 씨가 현장검증에 임하고 있다. 김씨는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의 공용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던 한 20대 여성을 무참히 살해했다. 김씨는 조현병 병력이 있던 정신질환 환자였다.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34세의 남성에게 수 차례 칼에 찔려 사망했다. 피의자는 사건 발생 9시간 만인 오전 10시경 인근 주점으로 출근하는 길에 체포됐다. 그는 흉기를 소지한 채 사건 현장 주변을 계속 맴돌았지만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검거 직후 피의자 김씨에 대한 신상정보가 언론을 통해 빠른 속도로 퍼졌다. 평범한 가정의 외아들인 김씨는 신학대학을 다닌 적이 있으며 2008년 조현병 진단 후 입원치료와 약물복용을 반복해온 정신질환 환자였다. 최근 인근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했고 뚜렷한 거주지 없이 근근이 살아왔음도 알려졌다.

김씨가 살인을 하게 된 구체적인 정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조사 과정에서 그는 “평소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고등학교 시절 한 여학생이 자신의 길을 막아서 지각한 적 있다거나 지하철에서 한 여성이 자신을 밀치고 지나갔다고도 했다.

살인을 계획할 만큼 무엇인가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는 건 명백하지만 그를 살해자로 만든 배경은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면 그의 진짜 분노는 무엇일까? 사건과 관련된 객관적 정보가 말해주는 의미는 명백하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가 단순히 한 개인의 범법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유인즉 그의 살인 행위에는 일종의 처벌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처벌 대상은 생면부지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해치기 쉬운 약자가 바로 여성이었던 탓이다. 특히 “함께 일하는 여직원이 나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의 진술은 여성에 대한 그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묻지마 살인’은 사회적 공분의 왜곡된 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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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에 시민들이 괴한의 흉기에 찔려 숨진 피해여성을 애도하며 “여성혐오 범죄를 예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피의자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평소 여성한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김씨에게 남성의 공격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여성의 공격은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는 여성이 그의 의식 속에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는 여성을 상대하는 경우에만 비교적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고 느꼈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 차별이 은근히 당연시되어온 것처럼 남성사회에서의 폭력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일례로 오래전부터 군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남성의 세계에서의 폭력에 대해 일정부분 당위성을 부여했다. 이 세계에서 강자와 약자의 구조는 일반적인 틀이었다.

물론 이는 대한민국의 구조를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한국사회에서 계층·학벌·지역 간의 상하구조는 위계사회를 나타낸다. 피의자 김씨 역시 경제적 하위계층에 속했다. 김씨에게 상대적 약자는 여성이었던 것처럼 그 자신도 또 다른 남성한테는 사회적 약자였다.

이렇듯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고 느끼는 계층의 사회적 불안감과 소외감, 그리고 공포감은 비단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결국 묻지마 살인은 사회적 공분의 왜곡된 표출이다. 묻지마 살인의 대표적인 사례인 유영철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영철이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도 노인과 젊은 여성이었다. 그는 검거 후 젊은 여성을 범행대상으로 한 이유에 대해 “여성이 함부로 몸을 굴리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아내와의 불화에서 오는 분노를 모든 여성에게 전가시켰다. 한편 자신의 경제적 비참함에서 비롯된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는 노인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밤늦게 돌아다니는 젊은 여성과 부촌에 거주하는 노인부부가 주요 범행대상임이 알려지자 사회적 불안은 커져갔다. 유영철은 특정범주에 속하는 사람을 잠재적 위험에 빠트림으로써 자신의 불행에 대한 보상을 얻고자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그 특정범주가 매우 단순하게 한정돼 있다. 오로지 여성이었다. 김씨가 남성사회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분노를 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사회적 약자였음을 드러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성을 위협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스스로에게 입증하려고 했다.

여성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이번 사건이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이하 ‘여혐’)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이 사건으로 강남역 근처에는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또래 여성의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졌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의 사회적 의미는 여혐이 아닌 더 큰 구조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얼마 전 지인과의 모임에서 이에 대한 열띤 토론이 오고 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흥분한 어조로 시작된 대화는 점점 더 격앙되어갔다.

남성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좁혀졌다. 여혐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하다’ 혹은 ‘유의미하다’는 것. 전자의 경우 이 사건이 그동안의 사건 유형과 비슷하기 때문에 여혐 논의를 촉발시킬 만한 기폭제가 되기에는 불충분한 사건이라는 것이 주된 요지였다.

이는 피의자 김씨가 검거 직후 기자에게 한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저 말고도 여러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죽인 게 문제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몇몇 남성이 강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정신질환을 가진 한 개인의 범죄를 왜 남성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키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성(性)대결로 귀결되는 여론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영화 <주토피아>처럼 육식 동물 전체가 나쁜 게 아니라 초식동물을 해치는 일부 육식동물이 나쁘다는 내용의 반박도 이어졌다.

이런 시선에 대해 또 다른 남성은 “강남역에서 남성이 죽었어도 이런 추모의 물결이 일어났을까?”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여성의 안전을 환기시키는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정신병자의 범죄로 그 의미를 제한시키는 것은 문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천안함사건’ 당시 “오로지 남성이라서 당한 피해였습니다”라는 내용의 문구를 단 근조화환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여성에게 성추행은 보편적인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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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는 시선은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마치 살인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신의 안전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에게만 달려있다는 얘기 같다며 그는 염려스러워 했다.

그러나 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대상화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그렇다고 모든 사회 현상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도 성급해 보인다.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신중한 사회적 논의다.

우선 이 사건의 초점인 ‘피의자 김씨의 살해 의도가 정신 질환이냐, 여혐이냐?’를 따지기에 앞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진 이유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목소리의 주체가 여성이라고 해서 이들의 발언 내용이 여성의 기득권만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약자의 대표로 호명된 대상이 우연히 여성이었을 뿐이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성 대결로 가는 등 장외 논쟁이 시끄럽다 해서 단순히 피의자인 김씨를 법의 기준으로 처벌하고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는 끝낼 수도 없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찾지 못할 것이며 김씨가 왜 생면부지의 여성을 죽였는지, 김씨가 왜 살인자가 되었는지도 영원히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토론에 참여한 한 남성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의 사회적 안전을 독려해야 한다는 기존의 가치에 동의함을 넘어서서 젠더로서의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현재 교직원으로 근무 중인 40대 남성인 그는 여성에게 살해에 대한 공포나 성추행이 보편적인 경험인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여성 구성원과 함께 살고 있지만(그는 아내와 딸과 거주하고 있다) 단 한 번도 그녀들이 성추행을 경험했으리라곤 몰랐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당시 자리를 함께 했던 여성들의 입에서 그간의 경험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라인이 전혀 구축돼있지 않던 1980~90년대에는 공공장소에서 성추행범을 맞닥뜨리는 일이 아주 흔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성과의 불쾌한 일은 주로 학교 앞 버스정류장, 옆집 옥상, 집 앞 골목길에서 발생했다. 어떤 날은 불편한 일이 그 모든 장소에서 한꺼번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성기를 내놓고 있는 남성을 만났고,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는 엉덩이를 만지는 남성을 만났다. 수업 중에 창문 너머에서 성기를 흔들고 있는 남성을 봤고, 하굣 길 버스 안에서 다시 허벅지를 더듬거리는 남성을 만났다.

간신히 집에 도착해 안도감을 느낄 찰나에 전화벨이 갑자기 울려댔다. 받아보니 자위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불명의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저마다 쏟아내는 경험이 대부분 비슷했다. 10여 년간의 성추행을 당한 경험 덕(?)에 우스갯소리로 이젠 남자 따위에 겁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익숙한 수치심을 넘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고 그녀들은 고백했다.

이 같은 여성의 공포는 1990년 후반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묻지마 폭행과 살인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번화가 화장실에서도 모르는 사람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자각이 폭발적인 공포를 일으키게 된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최근 일부 남성은 이 사건 때문에 여성이 공포에 휩싸인 것을 공감하면서도 ‘그동안 여성이 남성과 어깨를 겨눌 만큼 강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일례로 한 50대 남성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40~50대 남성에게 여성은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10~30대 자식세대는 다르다. 요즘 젊은 남성에게 여성은 새로운 경쟁상대로 부상했다”는 의미심장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10~30대 젊은 남성의 입장에서는 경쟁 상대가 늘어났는데 공교롭게도 그 장본인이 여성이었다. 자연히 여성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이 성적인 대결구도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0~30대 한국 남성에게 나타난 새로운 경쟁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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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이 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고 있다. 한국여성에게 성추행은 보편적인 경험 중 하나다. 특히 온라인이 구축돼있지 않던 1980~1990년대에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흔했다.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죄의 문제-시민의 정치적 책임>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시민으로서 공유해야 하는 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법적인 죄, 정치적인 죄, 도덕적인 죄, 형이상학적인 죄 이렇게 죄를 규정하는 네 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카를 야스퍼스는 한 개의 죄일지라도 네 가지로 분류된 죄의 개념에 따라 처벌되거나 속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법에 따르면 모든 죄는 처벌 가능하다. 좁은 의미에서 법은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등등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단어가 이해를 돕는 데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책임’이라는 단어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더 이해하기 쉽다.

피의자 김씨의 경우는 법적인 처벌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여성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그가 이미 법이자 심판관이었던 것이다. 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그의 살인은 정당방위였다. 때문에 법적인 처벌 기준에서의 유죄선고는 피의자에게 어떠한 내면의 변화도 촉발시킬 수 없다.

누가 뭐라 하건 그는 떳떳하고 정당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불의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가련한 영웅이다. 취재진의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도 인간이니까 나름대로 마음에 그런 부분은 좀 있다.”

유가족에게 조의를 표하긴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라는 그의 발언을 보면 법적인 처벌은 피의자 김씨에게는 오히려 속죄이자 구원의 기회일 수 있다. 김씨는 도망치지 않고 사건 현장 주변을 맴돌다가 강남역 주변에서 체포됐다. 그는 처벌이 두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과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던 김씨. 현재의 법 제도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자에게 너그럽다. 법 자체의 결함을 무시할 수 없어서 생겨난 ‘배려’인데 이를 무조건 잘못된 제도나 윤리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카를 야스퍼스의 둘째 죄 개념인 정치적 죄를 따져보자. 정치적 죄는 정치적 책임을 묻는다. 여기서 정치는 국가의 질서에 기대어 삶을 유지하는 국민에게 부과된 일종의 책임의식을 가리킨다. 정부의 정치적 행위로 발생한 결과에 대해 자국민이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이는 정치인에게만 그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이러한 정치의 영향권에서 자신의 삶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언론에서 드러난 김씨의 삶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면 그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선 그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과는 무관하게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을 납득하지 못했다. 살인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김씨의 망상은 그의 개인적 삶에서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이런 심리를 반영하듯 한때 우리 사회에서 ‘루저(loser, 패배자)’라는 단어가 남용되기도 했다.

능력주의, 성공주의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의 주요 슬로건은 외환위기 직후 등장했다. 외환위기의 책임을 져야 할 대상에서 국가는 제외됐고 날 선 심판의 칼날은 사회적 약자에게 겨눠졌다. 이번에도 최상위 기득권 계층은 안전한 위치를 선점했고 패자의 눈물만이 남았다.

패자였던 피의자 김씨는 여성을 특정 기득권 집단으로 보았다. 대개 인간의 사고 오류는 특정 개인의 잘못을 전체 집단의 잘못으로 오판하는 데 있다. ‘꼰대’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예로 들어보자.

보수적인 노인을 지칭하는 꼰대라는 단어는 학생 시절 유난히 권위적이고 보수적이었던 선생님에 대한 경험이나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일화에서 탄생됐다. 사실 지극히 개인적 경험이었을 뿐인데 ‘세상 노인은 전부 꼰대다’라는 식의 오류를 낳고 만 것이다.

인종에 대한 편견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피의자 김씨에게 여성은 편견의 시선에서 탄생된 거대하고 긴밀한 집단이다. 편견에서 망상으로 변질된 케이스로 보이는 김씨는 조사과정에서 “이러고 있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개인’의 잘못을 ‘집단’의 죄로 오판해 벌어진 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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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외국 여성이 5월 22일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아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경찰은 이날 이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발표했다. 2. 여성을 범행대상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일례로 강남역 근처에는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는 또래 여성의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졌다.

김씨의 이 발언에서 유추해보건대 그에게 여성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오만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악질집단이다. 그가 생각하는 여성은 자신처럼 고유한 이름을 가진 개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 모든 여성이 ‘뺑덕어멈’이고 ‘팥쥐’였던 셈이다.

그의 내면에는 ‘영희’, ‘지은’, ‘서연’ 등 이름을 가진 개인은 삭제되고 오직 여성이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연대해야 하는 집단에 불과했다. 이는 마치 국가와 국민의 관계와도 같다. 이렇게 보면 김씨는 23세의 젊은 여성을 살해한 게 아니다. 아마도 모두를 살해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삶에 부여된 정치·국가적 환경과 조건을 쉽사리 변화시킬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태어남과 동시에 규정되는 조건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김씨의 경우처럼 전후 세대를 부모로 둔 1980년 이후 세대에게 기억되는 국가는 탄생 순간부터 지금까지 체제나 이데올로기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가역적인 세계로 자리 잡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제도와 구조에 대해 순종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 이후 세대에게 가장 큰 무력감을 주는 대상이 국가 자체일 수 있다. 딱히 다른 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무력감이 카를 야스퍼스의 죄에 대한 셋째 정의 중 도덕적 개념의 죄로 이어진다. 시민은 도덕적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사회 관습적 권력 구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시민은 때때로 어떤 사건을 둘러싸고 연대적인 죄책감이 발현되기 보다는 집단적 도덕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고 침묵해버린다.

그러나 침묵은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외면하는 행동이다. 때문에 우리는 어렵더라도 사회적 문제에 있어선 연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연대의 중요성은 카를 야스퍼스가 주창한 넷째 죄의 개념인 형이상학적인 책임을 묻는 질문과 연결된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책임은 개인의 문제다. 공감의 능력이고 동일시의 윤리에 한정된다. 이를 전제로 보면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세간의 정의는 모두 합당하다. 정신병자의 살인일 수도 있으며 묻지마 살인이자 여혐에서 비롯된 살인일 수도 있다.

이 정의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르는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해석하고 각자 반성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성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말았다.

여성이 연대를 해버린 것이다. 이 연대는 ‘여성이라서 죽을 수 있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고 말았다’는 자각에서 시작됐다. 최근 강남역에 붙여진 한 포스티잇에는 “5월 17일, 그녀는 죽었고 나는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았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고 이 내용은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었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그대여,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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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20대 여성이 강남역에 “살려주세요. 넌 (남자니까) 살아남았잖아”라고 적힌 메모를 붙이고 있다. 이런 시선에 대해 일부 남성은 “‘묻지마 범죄’를 ‘여성혐오’로 조장해 성(性)대결로 몰아가는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다. 4. 최근 강남역에 배치된 한 조화. “5월 17일, 그녀는 죽었고 나는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았다”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우리사회에서 여성이 주요 범죄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내용이다.

살아남았다는 여성의 자각이 죄책감을 수반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간 실패했던 연대에 대한 죄책감이 고스란히 이 포스트잇에 드러나 있다. 뒤늦은 연대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다.

죄책감은 앞서 언급한 법적인 죄의 개념으로 보자면 자기 자신을 유죄라고 여기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여성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남성을 잠재적 피의자로 간주하는 것도, 피의자의 사과를 받자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그만 사회적 공분의 화살이 약자인 여성에게 집중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일종의 호소다. 다시 말해 공분의 분풀이가 타자에 대한 살인으로 해소되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정의감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물음표가 비단 남성에게만 향해 있는 건 아니라고 여성은 말한다.

“이제 그만 공분의 화살을 약자에게 겨누지 말아 달라.” 자신의 분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폭력의 주체에게 던지는 통렬한 질문이자 우리 모두의 성찰을 일깨우는 고발이기도 하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드러난 사회현상이 ‘성(性) 대결’로만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단순히 살인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써 약자를 더욱 약자로, 강자를 더욱 강자로 만드는 매커니즘만이 공고해지고 있지 않은지도 살펴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타인의 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숱한 살인사건을 도외시하지는 않았는가?

이 사건을 두고 도덕적인 책임에서 보자면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책임에서 보자면 우리는 피해자다. “내가 죽을 수 있었다” “누구나 죽을 수 있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문장이 어찌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일 수 있으랴.

무엇보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이 조현병 환자에 의한 묻지마 살인이라면 더욱 저 문장 속의 ‘우연히 살아남은 당신’은 우리 모두를 가리킬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그저 운 좋게 살아남기만을 바랄 것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강제 입원시키고 남녀공용화장실을 없앤다고 해서 우리의 생존지수가 높아질 리 없다. 카를 야스퍼스는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죄의 문제는 타인이 우리에게 제기한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자신에게 제기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죄라는 단어를 책임이라는 단어로 바꿔 읽는다. 피의자 김씨에게 따져 물어야 할 법적인 책임은 이제 법조계의 손에 달려 있다. 다만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책임감은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이 책임감은 피의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향해 있다. ‘무거운 십자가’라 해서 서로 떠안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또한 유죄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책임이 곧 죄의 유무를 판가름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책임지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

황현진 - 1979년생. 소설가. 2011년 장편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평소 ‘소통’과 ‘연대’에 관심이 깊으며 글을 통해 삶을 탐구하고 세상에 질문하는 젊은 문인이다. 주요 저서로 소설 <달의 의지> 등이 있다. 과거를 해석하며 오늘을 산다는 그녀는 최근 ‘문학동네’에 신작 <두 번 사는 사람들> 연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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