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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 민족주의 물결이 한국도 휩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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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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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전 세계는 지금 외국인 혐오증이 분출하는 반체제·반세계화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국제주의적인 엘리트는 후퇴하고 있다. 최근 영국 유권자들은 예상과 달리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국제주의적인 ‘잔류’ 입장이 쉽게 이길 것이기 때문에 유럽연합(EU)을 둘러싼 보수당 내부의 끝없는 분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계산했다. 잘못 판단한 결과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됐다. 브렉시트 정국에서 활기 없는 모습을 보여준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 또한 곧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얄궂게도 코빈 자신이 노동당의 당내 체제를 뒤집은 반란의 산물이다. 미국에는 트럼프 현상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작지만 그가 일으킨 현상은 브렉시트 이후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2일 실시된 호주 총선에서는 맬컴 턴불 총리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국가에 대한 불만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중국 공산당을 겨냥한 반부패 캠페인으로 불만에 대처했다.

세계화가 기성 체제 불신 낳아
곳곳에서 엘리트가 신뢰 상실
한국도 반체제 기류 이미 등장
다음 대선에서 새 리더십 기대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반체제 민족주의 물결이 2017년 한국 대선에도 들이닥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결’의 원인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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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이론이 있다. 첫째, 경제적인 불평등 탓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지니계수로 따져보면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의 빈부 격차는 줄었다. 현기증 나는 세계화 때문에 저소득층과 중간소득층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게 진짜 원인일 수 있다. 특히 노년층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지지한다. 반세계화 운동의 주요 타깃은 자유무역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미국의 일부 경제 부문에서 실업률이 증가한 주된 원인은 낮은 관세가 아니라 자동화다. 또 일부 통계에 따르면 제조 부문의 세계화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미국 성인 인구의 10%도 안 된다. 따라서 실업·세계화·무역 문제를 디딤돌로 삼으며 기성 체제에 대항하는 후보들이 나올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들이 당선될 가능성은 없다. 사실 미국에서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다수의 미국인이 아직 자유무역을 지지한다. 트럼프, 버니 샌더스, 그리고 가끔은 힐러리 클린턴까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한·미 자유무역협정(KORUS FTA)을 공격하지만 말이다.

둘째, 반체제 운동의 원동력은 경제 변화가 아니라 사회 변화에 대한 분노다. 이민 문제가 시금석이다. 트럼프 캠페인의 핵심 중 하나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장벽’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이었다. 브렉시트가 통과될 수 있었던 것도 EU의 이민정책을 끔찍이 싫어하는 유권자들 덕분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무엇을 가장 우려하는지 여론조사를 해보면 ‘사회의 급속한 변화’가 ‘경제’나 ‘테러’보다 상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반세계화가 승리의 토대로는 역부족인 것처럼 이민이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은 선거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셋째 이론은 매체 환경의 변화를 지목한다. 세계의 대다수 젊은이는 모바일 장치로 접근하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 반면 미국의 노년층은 전통적인 매체를 청취한다. 그들 덕분에 미국 전역에서 라디오·TV 토크쇼가 번창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의견은 수정되는 일 없이 끊임없이 강화된다. 의견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과 신뢰도가 낮은 매체들은 공포감을 조성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악마’ 취급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한다.

엘리트층의 신뢰성 상실이 원인이라는 게 넷째 이론이다. 새로운 매체 환경 때문에 정치인들은 공공 이익을 위해 다른 정파 사람들과 조용히 타협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점수를 따기 위해 TV에 출연하고 대중의 감정에 영합한다. 정치인들이 아무 일도 못 하기 때문에 유권자는 더욱 분개한다. 인구 고령화로 사회복지 요구가 커지는 반면 과세 대상은 줄기 때문에 각국 정부가 직면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러한 물결이 한국을 강타할 것인가. 지난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것을 보면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세계화와 낮은 청년 취업률을 배경으로 하는 ‘경제 민주화’ 요구는 이미 한국 정치를 흔들고 있다. 한국의 반이민 정서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약하다. 사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이주자들에게 보다 호의적이다. 하지만 교육받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인 적대감이 위협으로 남아 있다. 한국은 소셜미디어와 무선통신이 정치를 변화시킨 최초의 민주국가 중 하나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 좋은 예다.

확정적인 것은 없다. 정치는 구조와 리더십에 의해 형상화된다. 국제 체제와 국내 경제라는 구조는 포퓰리즘을 낳지만 리더십이 그래도 중요하다. 포퓰리즘의 물결이 지나고 나면 국민을 보다 자신감 있는 국제주의로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2017년 대선은 새로운 리더십의 향방을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