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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3)-<제84화 올림픽 반세기>(22)김성집|전란속의 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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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헬싱키 올림픽을 얘기하려면 어쩔수 없이 악몽의 6·25를 연상하게 된다.
이젠 내가 겪은 6·25와 어렵게 훈련하던 시절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런던 올림픽에서 돌아온 뒤에도 나는 휘문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며 역도부를 지도했다.
나 자신의 훈련은 학교 역도실이나 신당동 도장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집안 마당에서 개인 연습에 몰두했다.
아직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대를 물려줄 마땅한 후계자도 나오지 않아 연습을 중단 할 수 없었다.
개인연습이란 다름 아닌 새벽마다 시멘트 덩이 역기를 들어올리는 체력단련이었다. 새벽 개인연습은 남들이 「비밀훈련」 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 계속된 나의 습관이었다.
1949년 3월엔 고려대 출신 체육인을 주축으로 고려역도구락부를 창립했다. 역도연맹의 힘이 미약했으므로 일선에서 자체적으로 힘을 모아 역도선수를 양성하자는 것이 창립 목적이었다. 홍성하회장과 유진산·이철승부회장이 많은 힘을 써주었고 나는 이사로 활동했다.
이때 첫 사업으로 역도 붐을 조성하기 위해 미스터 코리아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첫 미스터 코리아엔 레슬링을 하던 장사 조순동이 뽑혔다.
1950년 6월25일 북괴의 남침으로 서울은 쑥대밭이 됐고 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나는 가족들만 먼저 남하시키고 일단 서울에 잔류, 당시 역도연맹 서민호회장의 주선으로 조선전업에 근무하며 관망했다.
그러나 이듬해 1·4후퇴로 정세가 험악해지자 어쩔수 없이 이철승부회장과 함께 고생스런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에 자리를 잡은 나는 계속 조선전업에 근무했다.
전시의 피난수도였지만 부산에서는 다음해의 헬싱키 올림픽에 대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역도인들은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간청, 역도선수들을 해군사관학교 문관으로 써주도록 했다.
이리하여 나와 이규혁·남수일·최항기 등 4명이 1951년 3월부터 해군사관학교 문관으로 임명돼 훈련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해군사관학교측의 배려로 빈 창고를 얻어 빈약한 기구로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낮에는 주로 하사관 숙소 옆 공터에 바벨을 내놓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훈련을 거듭했다.
전쟁에 시달리던 당시로서 우리의 훈련 여건은 다른 선수들에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그해 10월 광주에서 열린 올림픽 1차예선겸 32회 전국체전에 해사팀으로 출전한 우리는 나와 남수일·이규혁이 각각 우승을 차지했다. 나와 이규혁은 각각 추상과 인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작성해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이규혁은 이듬해 4월 대구극장에서 열린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김해남에게 밀려 아깝게 2위를 차지, 올림픽 재도전의 꿈은 좌절됐다.
헬싱키 올림픽대표 선발과정에서 체육회와 경무대의 갈등이 심각했었다는 얘기는 이미 썼지만 역도의 경우 체육회는 당초 8명을 선발했으나 최종적으로 4명만이 확정됐다. 이 바람에 나는 감독 겸 선수로, 1인2역 하느라 고심하던 생각이 난다.
또 다른 헬싱키대회의 추억은 세계적인 역사 「존·데이비스」(미국)와의 해후였다. 「데이비스」는 해방 후 미군으로 한국에 주둔하며 우리 선수들이 필라델피아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첫 출전 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아 주었었다. 「데이비스」 는 런던 올림픽에 이어 헬싱키대회에서 역도 헤비급을 2연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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