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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TALK]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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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인가』 오종우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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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우 성균관대 교수는 “러시아 문학은 달콤한 위로로 현실을 망각하게 하지 않는다”며 “무겁고 힘든 삶의 진짜 모습을 그려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애칭 ‘로쟈’)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죄와 벌』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혼탁해지고 안락이야말로 인생의 핵심이라고 떠들어대는 바로 우리 시대의 사건’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설명을 이해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무엇이 인간인가』는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10년 넘게 가르쳐 온 오종우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의 『죄와 벌』 강의록이다. 그는 “날로 흉흉한 범죄가 늘어가고,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바둑을 더 잘 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으로 『죄와 벌』을 권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들춘 인간의 심연
극도로 고결한 것과 추악한 게 공존
날로 각박한 시대, 깨달음을 주는 고전

왜 지금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 하나.
“인간의 실체를 예리한 통찰로 조명한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 어둡고 음울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돼 불편하다. 이 무겁고 음침한 분위기는 창조된 허구가 아니라 인간의 감춰진 심연을 들춰낸 것이다. 외면하고 싶지만 부정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실체다. 모두가 ‘살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도스토옙스키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다.”
여러 작품 중 『죄와 벌』을 고른 이유는.
“강의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 『악령』 같은 작품을 다뤘다. 『죄와 벌』은 초등학생도 다 읽었을 정도로 잘 알려진 고전이라 굳이 대학에서 다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청소년용 축약본을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공 로쟈가 살인을 저질렀다가 소냐를 만나 뉘우치고 반성한다는 식의 단순한 동화로 각색돼 있더라. 이건 아니다 싶었다. 『죄와 벌』 안에는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잔혹한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가 뭔지, ‘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살기가 힘든가’라는 오늘날 우리의 고민을 밝혀주는 통찰이 담겼다.”
학생들은 『죄와 벌』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처음 학생들은 ‘난 이 작품 다 안다’며 좋아한다. 대학 논술전형을 준비하면서 줄거리 숙지하고 작품의 시대적 배경까지 이미 훑은 학생이 많은 거다. 하지만 강의가 끝날 때쯤이면 ‘제대로 읽어내기 힘들었다’는 얘기와 ‘내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말한다.”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루진이라는 인물을 다룰 때다. 변호사인 루진은 로쟈의 여동생인 두냐의 약혼자다. 가난한 두냐의 집안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겉으로만 보면 백마 탄 왕자님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이기심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뻔뻔함, 끊임없이 자신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루진에 대해 많은 학생이 ‘그를 마냥 비난하기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많이 겹쳐 보인다’고 하더라.”
강의 도중 학생들과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했다.
“부자인 루진이 여동생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약속하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로쟈가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학생들은 ‘가난한 집 처녀가 부자 남편을 만나 집안을 일으키는 게 왜 나쁜가’라며 화내는 로쟈를 이해하지 못하더라. 오히려 ‘두냐가 잘한 것 같다’고들 했다. 현재의 시대 정신이 그런 것 같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부자 남편을 만나는 것이 행복한 결혼인 양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많은 사건 사고를 들여다보면 루진처럼 계산기를 두드려 손익계산서 작성하듯 인간관계를 맺는 데서 불행이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고전을 읽어가며 인간관계란 계산이 아닌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독서법에 대한 조언도 인상적이다.
“강의 초반에는 항상 독서 근력에 대해 얘기한다. 시간을 충분히 들여가며 한 문장씩 떼어 읽고 곰곰이 사유하며 치밀하게 읽어내라고 강조한다. 번역서의 경우는 좋은 번역본 두 권을 골라 비교하며 읽어야 정확하고 풍부한 감상이 가능하다. 번역자마다 뉘앙스의 차이가 있어 비교하며 읽다 보면 좀 더 원작에 가까운 감상을 할 수 있다. 중요한 부분은 수업 시간에 러시아 원문 내용도 가르쳐준다. 책을 여러 권 읽는 것보다 한 권을 이런 식으로 찬찬히 제대로 읽는 게 훨씬 의미 있고 값지다.”
많은 사람이 ‘1년의 100권 읽기’같은 다독 프로젝트를 강조하기도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1년에 100권이 아니라 1000권을 읽을 수 있는 책도 물론 있다. 중량감이 떨어지는 책을 많이만 읽는다고 바람직한 독서라 할 수 없다. 차라리 불편하고 버거운 고전 한 권을 정해 ‘한 권 열 번 읽기’같은 독서법을 실천하는 편이 훨씬 낫다. 대학에서도 문학사 수업 같은 걸 하면 한 학기에 장편소설을 10권 이상 읽게 한다. 그건 학생들에게 책은 안 읽고 인터넷에서 자료 베껴서 읽은 척하는 법, 즉 사기 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문학사 수업을 할 때도 한 학기에 소설책 딱 두 권만 읽게 한다. 대신 치밀하고 꼼꼼하게 진짜로 읽힌다. 학생들은 이런 독서를 10권 읽기보다 더 힘들어한다.”
책 제목이 『무엇이 인간인가』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어떻게 해도 인간은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극도로 고결한 것과 극도로 추악한 것이 공존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수께끼라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고찰하고 있다. 그는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얘기했다. 타인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그의 처지에 서보는 일이 바로 공감이다. 인공지능은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무엇인지, 그가 말하는 인간다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오종우 교수가 추천하는 러시아 소설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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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을유문화사
김연경 옮김, 민음사

‘인류의 정신 유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인간에 대한 저자의 겸허한 성찰과 예리한 통찰이 번뜩인다. 거칠고 죄 많은 인물들의 거룩한 면모가 역설적으로 빛나는, 울림이 큰 작품.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격(格)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민음사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톨스토이는 세상을 운용하는 불멸의 진리를 찾고자 했다. 그가 마침내 밝혀낸 진리가 이 작품 안에 담겼다. 꾸밈과 거짓이 없는 소박한 생활이 얼마나 멋진 인생인지 알려주는 장편소설이다. 인간은 문명을 만드는 자연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닥터 지바고』 파스테르나크 지음
박형규 옮김, 열린책들

데이비드 린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도 만나볼 수 있다. 영화에 흐르는 애잔한 주제가 ‘라라의 테마’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시베리아의 눈 덮인 평원과 혁명으로 떠들썩한 대도시 모스크바의 선명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에로스가 담고 있는 진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체호프 단편선』 체호프 지음
김학수 옮김, 문예출판사
박현섭 옮김, 민음사

세상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자유와 희망도 싹튼다. 체호프의 단편에 담긴 엉뚱하고 일상적인 유머와 상상력을 읽다 보면 정답 없는 삶에 희망과 자유를 선물로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글=오종우 교수

[BOOK&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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