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신의 | 국회 부의장 선출의 「이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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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8일 일어난 야당 티킷의 국회 부의장 선출 파문은 12대 국회 개원이래 최대의 위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소용돌이가 어디까지 미치고 어떤 결과를 빚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본회의 대 정부 질문을 끝내고 상위 활동으로 들어가기로 된 정기국회 운영 일정에 적어도 상당한 차질이 생긴 것은 분명해졌다.
가뜩이나 하루 하루가 아슬아슬하게만 느껴지던 국회의 정상 운영이 부의장 선출을 고비로 좌초하고 만 것은 어이없다.
민정당측 주장대로 사태가 이쯤에까지 이르게된 원초적인 허점이 「신민당안의 분열상과 당외 세력에 의한 조정·통제 등 신민당의 구조적 모순」에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야당쪽에 할애된 부의장은 야당쪽에서 지명 한대로 선출해주던 지금까지의 분례라든지, 특히 야당쪽 공식 후보를 뽑아 주겠다고 한 여당쪽의 사전 약속에 비추어 신민당이 「파렴치한 정치적 배신 행위」라고 성토하는 이유는 일리가 있다.
투표결과만을 보아도 사태가 민정당의 「위약」에서 빚어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정당이 「위약」을 한 이유가 과연 신민당쪽 주장대로 신민당안의 일부 이견을 이용, 야당을 분열시키려 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그 진상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1차 투표 직후 민정당 지도부가 이용희 의원에게 표를 몰아주도록 거듭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그렇게 나타났다면 이는 소속 의원들의 조직적 항명이었거나 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지시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민정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사전에 짜고 연출한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설마하니 국정을 주도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집권당이 정치 신의나 도의면에서 그런「사술」을 썼으리라 믿고 싶지는 않다.
또한 일사불란을 생명으로 하는 민정당의 체질로 보아 조직적인 항명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더더욱 없다.
이렇게 보면 당 지도부의 지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방만성 때문이 아닌가 보여지는데 어떤 경우건 이번 사태로 민정당에 돌아갈 지탄의 화살을 면해 주는 구실은 하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사태의 책임이 어느 쪽에 더 있는지는 2차 적인 관심사에 불과하다. 궐석이된 야당쪽 국회 부의장에 조씨가 되느냐 이씨가 되느냐는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문제는 신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여야 간의 대결이 이 나라의 정치적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얽히고 설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이 정치인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한꺼번에 풀기 어려우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가닥씩 풀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타협의 묘라든지 성실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정국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도무지 그렇게 노력하는 흔적이 없다.
매듭을 풀고 막힌 것을 뚫기는커녕 뚫린 곳도 막고 풀릴 기미가 있는 매듭을 오히려 얽히게 하는 형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더욱이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 등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부질없는 정쟁으로 지새울 것인지 국민은 엄중히 묻고 싶다.
우리는 이번 일로 어렵고 큰일을 해 나가야 할 대공당에 대한 국민의 신임에 상처가 생긴 것을 지극히 아쉽게 생각한다. 반대를 하려면 내놓고 당당하게 대도를 걸으며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겠는가.
한편 신민당 또한 구시대적인 계보 정치에 매달리다 잡음의 소지를 낳고 그 때문에 상대 당에 의해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보다 확고한 태세 정비를 해 나간다면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길도 열리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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