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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사진관] 난 30년만 더 할테니 네가 50년 더하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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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옥 씨가 30년을 뜻하는 손가락 세 개를, 며느리 민경선 씨는 손가락 다섯개를 피며 웃고 있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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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아닌 아빠와 딸처럼 보인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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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민경선 씨, 오른쪽 지병옥 씨 손. 오상민 기자

난 30년만 더할테니 네가 50년 더하렴.”

60년째 플루트 고쳐 온 신광악기 지병옥 씨, 대를 잇겠다는 둘째 며느리 민경선 씨.

환갑은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공자는 60세를 이순(耳順)이라 하고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이해한다고 했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려면 최소 10,000시간을 투자하라는 ‘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60년은 21,900일이고 525,600시간이다.

“60년이라고 하는 세월은 긴 세월이 아니에요. 짧은 세월이라고. 내가 앞으로 30년 더 할 예정이니(웃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모든 걸 할 수 있으니 걱정없어요.”

신광악기의 지병옥(77)씨는 올해 8월이면 플루트를 수리해 온 지 만 60년이 된다. 세월의 흐름을 묻는 말에 손가락 세 개를 핀다. “이게 뭔지 아우? 하나당 십년이라우. 앞으로 이것만 더 할라고”라며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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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2층에 위치한 신광악기. 이 자리에서만 43년째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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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옥 씨 혼자 지켜온 자리지만 이제 며느리 민경선 씨가 함께 자리를 지킨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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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를 위해 해체중인 플루트의 부품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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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씨는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서 신광악기를 운영한다. 플루트를 전문으로 수리한다. 70년대 초반 종로에서 시작해 낙원상가로 들어온지 43년째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는 물론 미국, 유럽, 심지어 아프리카에서까지 고쳐달라고 의뢰가 들어온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 플루트 수리 명인이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지 씨는 50년대 중반 세공업 일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어느날 부터 악사들이 악기를 들고 찾아와 수리를 부탁했다. 당시 섹소폰, 트럼본 등 악기를 고쳐주는 곳은 없었다. 쇠를 다루는 곳이니 무작정 찾아왔다. 땜도 하고 망치로 두드려서 폈다. 그렇게 지 씨와 악기의 인연이 시작됐다. 대중적 유행을 타지 않고 클래식 악기인 플루트가 좋았다. 플루트만 파기로 결심했다. 매뉴얼도 없고 누가 알려준 것도 없다. 혼자 뜯어보고 붙여보고 혼자 힘으로 독학해 오늘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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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옥 씨는 올해 8월이면 플루트를 고쳐온지 만 60년이 된다. 60년은 긴 세월이 아니라고 지 씨는 말한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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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 키 부분을 조율하고 있는 지병옥 씨의 손.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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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을 마친 플루트를 검사하고 있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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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도구들. 기성제품도 있지만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도구들도 눈에 보인다. 오상민 기자

오직 플루트가 좋아 온 길이다. 자신이 한평생 온 그 길을 누군가 지켜갔음 했다. 아들 둘은 다른 삶을 원했다. 어느날 둘째 며느리 민경선(44) 씨가 찾아와 대를 잇겠다고 했다. “며느리가 찾아와서 이걸 하겠다고 할 때 반신반의했지요. 아들들도 안한다고 했는데 그걸 며느리가 한다고 그러니까. 거 정말 반갑고도 반가운 일이지” 지 씨는 반갑고 고맙다고 한다. 민경선 씨는 주일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고,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악기와는 무관한 삶이었다.

민 씨는 작년 11월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개척을 하신거잖아요. 그 길이 잊혀져간다는게 안타까웠어요. 보존하고 싶은 마음과 아버님의 그 세월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라며 “아직 부족한 것 투성이죠. 아버님이 오랫동안 함께 이 자리에 계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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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며느리 민경선 씨. 작년 11월부터 대를 이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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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 키 부분을 검사하고 있는 민경선 씨 손. 오상민 기자

돈과 부귀영화보다 사람과 신의를 중시해 온 길이다. 가게는 아담하지만 수십 년 된 단골이 많다. “요즘 제가 전화를 받으면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잘못건 줄 착각하는 분들도 있고요. 며느리라고 설명드리면 그 때서야 이해하세요”라며 민 씨가 웃는다. 그간 지 씨 혼자 걸어온 길이다. “여기서 함께 일을 해보니 이 작은 공간에서 40년이 넘는 시간을 혼자 인내의 시간을 보내셨다는 것이 존경스러워요. 앞으로도 제가 가장 본받아야하는 부분 같아요”

플루트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인생과 같다. 어렵고도 쉬운 문제다. 이건 오로지 인내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지 씨가 말한다. “저에겐 새로운 길이기도 하지만 아버님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주는 매개체에요. 세월이 지나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버님을 기억할 수 있는 유물 같아요. 그냥 아버님 같은, 아버님이 여기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순간 민씨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둘의 모습은 시아버지와 며느리보다 아빠랑 딸 같은 모습이었다. 웃는 모습이 닮았다. 가족이 닮는다는 말이 사실이다. 아마 둘은 더 닮아갈 것이다. 앞으로 스승과 제자로 매일 함께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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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악기 가게는 10평 남짓이다. 돈보다는 사람과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수십 년간 단골손님들이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리를 의뢰한다. 오상민 기자

사진·글=오상민 기자 oh.sa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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