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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친박이 천박해지면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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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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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지난달 한 대기업의 임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기업의 간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저쪽 룸에 친박 의원들이 모여 있다”며 화장실 가는 것도 참는 눈치였다. “요즘 친박들이 자주 이곳에 온다. 국회에는 지켜보는 눈이 많고 호텔은 비싸기만 하고…. 무엇보다 여기는 임원들만 떠벌리지 않으면 보안이 확실하다.” 정치인들이 대기업 구내식당에 출몰하는 것부터 처음 보는 현상이다. 자칫 구설에 오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새누리당 친박계는 남의 눈을 피해야 할 만큼 비밀 이야기가 부쩍 많아진 모양이다.

지난주 유승민 의원의 복당에 반발하는 친박계를 보면서 그 구내식당이 떠올랐다. 혹 몰래 그곳에 모여 복당 반대 작전을 짠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친박 거물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행동대원들만 거칠게 나섰다. 일부 맹동주의자의 언동은 눈에 거슬리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비상대책위원회의 쿠데타” “청와대에 대한 반기”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진정한 친박이라면 ‘쿠데타’라는 단어는 금기다. 무덤 속 박정희 전 대통령이 통곡할 일이다. 친박 쪽이 주범으로 지목된 정진석 원내대표에게 ‘축출’이란 표현까지 동원한 것도 너무 했다. “똑바로 안 하면 쫓아내겠다”는 패권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

요즘 친박들의 용어는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다. 총선 공천 때 친박 쪽은 유승민을 괴롭히며 이렇게 말했다. “컷오프로 망신당하기 전에 나가라. 그것이 유승민에 대한 우리의 예우이고 애정의 표시다.” 이는 ‘예우’와 ‘애정’에 대한 모독이다. 휴대전화로 대통령을 향해 속삭여야 할 충성 맹서를 굳이 방송 인터뷰를 통해 온 국민에게 공개해 망신을 자초했다.

친박이 ‘의리’와 ‘배신’으로 세상을 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유·복지·경제성장·인권 등 훨씬 훌륭한 잣대가 많은데 왜 굳이 조폭이나 양아치 집단이 어른거리는 용어를 선택했을까. 국민정서의 역린을 건드리며 짜증만 돋울 뿐이다.

친박은 지금 가장 중요한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확장이나 발전보다 후퇴와 고립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와 비교해 보자. 김영삼은 1996년 골수 재야운동가였던 김문수·이재오를 영입했다. 김대중은 평생 여당이던 이종찬·김중권을 끌어들여 최고 요직인 안기부장과 비서실장을 맡겼다.

유승민 등의 복당에 반대해온 친박의 눈에 김영삼과 김대중의 ‘새 피 수혈’은 어떻게 비칠까. 배신자와 적군의 스파이를 끌어들이는 ‘미친 정치’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은 양김의 이종교배(異種交配)에 열광했다. 오히려 친박의 순혈주의가 패쇄적으로 비칠 뿐이다.

지금 친노와 친박은 적대적 공생관계다. 둘의 공통점은 많다. 문재인 전 대표는 “노무현과 인연이 있던 정치집단을 친노라고 한다면 한번도 패권을 가져본 적 없다”고 친노 패권주의를 부인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친박을 만든 적 없다. 선거 때 자신들을 위한 마케팅”이라고 부인했다. 원래 강한 집단은 스스로 힘을 감추는 법이다.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한번도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잖아요.”(소설가 김훈) 그러면서 자신들이 꼭 필요할 때는 “노무현이란 이름으로 정치마케팅에 팔지 말라”(문재인, 노무현 6주기 성명)거나 “친박을 팔지 말라”(유기준 의원 원내대표 출마 강행 때 청와대의 경고)고 했다.

친박은 진박·비박·신박 등의 다양한 파생어를 낳았다. 드디어 ‘친박은 천박하다’(이상돈 의원)는 말까지 듣고 있다. 말과 행동이 퇴행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원내대표마저 ‘축출하겠다’는 건 정치 용어로는 패권주의요, 요즘 단어로는 갑질이다. 청와대와 친박은 혹시 여야와 비박 진영을 하청업체로 간주하지 않았는지 되새김질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한번 ‘갑’으로 찍히면 끝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지하철 구의역 9-4번 승강장처럼 언제 친박들은 ‘을’들의 포스트잇으로 도배될지 모른다. 지금 친박이 가장 경계해야 할 단어는 ‘천박’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기업 구내식당에서 마주치지도 않았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