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히포’의 시대가 저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사 이미지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사회생활에 관한 한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하지만 경험상 하나는 확실히 안다. 조직의 소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상사일수록 실제론 소통할 의지가 별로 없다는 사실 말이다.

소통이란 함께 일하는 사람끼리 관련 업무 정보를 공유하고, 모두가 의견을 표시할 기회를 가질 때 제대로 이뤄진다. 그런데 입으로만 소통을 부르짖는 상사는 정반대다. 함께 나눌 비전도, 비판적 갈등을 합의로 이끌어낼 포용력 같은 실력도 없이 그저 ‘소통하는 상사’라는 수식어에만 목을 맨다. 이 수식어가 자신을 빛내 더 좋은 자리로 이동하는 발판이 될 거라 생각해서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지위를 이용해 소통까지 강요한다.

직장인이라면 굳이 사례를 들지 않아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느 조직이나 이런 상사가 적지 않았다. 실력은 뒷전이고 자기 포장술 키우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본인은 승승장구했을지 몰라도 결국 조직은 망가지기 일쑤였다. 이런 ‘히포(Highest-Paid Person’s Opinion·고위직의 의견)’의 큰 목소리가 조직에 정말 필요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려버린 탓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글 노잉(인터넷 검색을 통한 지식 습득)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런 실력 없는 히포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다. 모든 지식을 검색 한 번으로 찾아낼 수 있는 구글 노잉의 시대엔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엔 어느 직급의 의견이냐가 가장 중요했기에 조직 내에서 히포가 모든 걸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이젠 아이디어의 질적 수준이 의사결정에 더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렇지 않은 조직은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에릭 슈밋 전 구글 CEO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느 조직이든 생각하라고 사람을 고용한다. 스스로 생각을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해왔던 사람,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질문에 답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직급 불문 쓸모가 없어졌다는 의미다.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공부하는 대신 윗사람 눈 밖에 나지 않을 만큼만 시키는 대로 하는 얄팍한 처세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다.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변화와 혁신의 시기에 어느 조직에서든 짐이 되지 않고 필요한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게 내 경쟁력을 키우는 동시에 조직에 충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히포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안 혜 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