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다양성 외화 시장 신흥 강자 ③ 엣나인필름 정상진 대표 - 세상을 흔드는 영화라면 무조건 덤빈다

중앙일보

입력 2016.06.17 10:07

업데이트 2016.11.09 10:20

제6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자비에 돌란 감독의 ‘단지 세상의 끝’. 이 영화가 프랑스 칸에서 첫 상영된 현장을 페이스북으로 생중계한 이가 있다. 외화 수입사 엣나인필름의 정상진(48) 대표다. 엣나인필름은 돌란 감독의 모든 연출작 판권을 보유한 전 세계 유일의 영화사다. 그뿐 아니다. 상영 등급 반려로 ‘볼 권리’에 대한 담론을 불러일으킨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 볼륨1·2’(2013), 스타 감독과 배우 없이 기발한 스토리로 국내에서 관객 9만 명을 모은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 자코 반 도마엘 감독) 등 개성 강한 영화를 도맡아 수입했다. 현재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을 함께 운영 중인 정 대표는 영화계에서 소문난 ‘귀 변태’이기도 하다. 아트나인을 비롯해 그가 관여한 극장들은 사운드 시설 퀄리티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외화 수입 및 배급뿐 아니라 한국영화 투자·제작, DMZ국제다큐영화제 부집행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 필름 마켓 자문위원 등으로 다방면에서 의식 있는 행보를 걸어온 정상진 대표. 그를 칸영화제 직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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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희찬(STUDIO 706)]

-올해 칸영화제에서 자비에 돌란 감독과 만났다고.
“안면을 튼 건 2년 전 ‘마미’(2014)가 칸영화제에 초청됐을 때다. 올해는 차기작 ‘더 데스 앤 라이프 오브 존 F 도노반’(이하 ‘도노반’)의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자리여서 조금 더 여유 있게 만날 수 있었다. ‘도노반’은 할리우드에서 곧 촬영에 들어간다.”

-돌란 감독에게 처음 ‘꽂힌’ 순간을 기억하나.
“2009년 칸영화제에서 ‘하트비트’(2010) 포스터에 반해 영화를 보지도 않고 샀다. 그런데 그 영화가 히트를 쳤고, 국내에 돌란 감독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의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는 다른 수입사가 샀다가 우리에게 넘어왔다. 운이 좋았지. 이후 ‘로렌스 애니웨이’(2012) ‘탐엣더팜’(2013)으로 라인업을 채워 갔다.”

-돌란 감독의 반응은.
“그도 우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마미’ 한국판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며 인스타그램에 공유한 적도 있다. 신작이 나오면 엣나인필름과 꼭 함께하고 싶다고 나에게 직접 연락한다. 몸값이 뛴 탓에 부담은 된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5000달러(약 580만원) 주고 샀는데, ‘도노반’은 일본에 제시한 애스킹 가격(제작자나 배급사가 팔기 원하는 가격)이 300만 달러(약 35억원)다. 일본 시장은 국내 세일즈 가격의 두 배 정도다. 내가 품을 수 있는 그릇을 넘어서고 있다.”

-‘단지 세상의 끝’은 올해 칸영화제에서 평단과 언론의 혹평이 심했다. 국내 흥행이 걱정되진 않나.
“전작을 모두 본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촬영이 훌륭한 영화를 좋아하는데, ‘단지 세상의 끝’은 영화학도들이 교과서처럼 봐야 할 영화다. 돌란 감독이 좋은 배우들을 자기 스타일 안에 가뒀다는 혹평도 있더라. 오히려 나는 이 영화에서 뱅상 카셀과 마리옹 코티아르의 새로운 면을 봤다. 특히 주연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은 돌란 감독의 분신처럼 빙의된 듯 연기한다. 아역 배우 출신 감독이라 배우들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번 혹평을 계기로 그가 한층 성숙할 것 같다.”

-영화학도 출신이라고.
“고등학생 때 새벽에 남산 영화촬영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 가면 25인승 촬영 버스가 있었다. 잠든 스태프들 틈에 끼어 무작정 영화 촬영 현장에 갔다. 어린 게 겁도 없다고 핀잔하면서도 밥은 주더라(웃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해 연출부로 일했다. 촬영 전공 후 연출까지 해 보고 싶었는데, 시나리오 쓰는 데 자신이 없어 딴 길로 샜다.”

-영화계엔 어떻게 돌아왔나.
“해외 청바지 브랜드 론칭부터 자동차 잡지 발행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문득 영화과를 나와서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당시 서울에 자동차극장이 없을 때다. 남산 자락에 괜찮은 터가 있는데 허가받기 어려워, 6개월간 수입도 없이 서울시청 총무과에 거의 출퇴근했다. 1998년 자동차극장을 열면서 자리를 잡았다. 2년간 40억원 넘게 벌었다. 2004년 씨너스(현 메가박스) 이채·이수 두 곳에 극장을 열었다.”

-외화 수입에 뛰어든 계기는.
“사회문제엔 관심 없이 내 멋대로 살았다. 그러다 ‘어둠의 아이들’(2008, 사카모토 준지 감독)을 보고 충격받았다. 자기 아이 살리려고 멀쩡한 다른 나라 아이들 장기를 밀매하는 이야기다. 당시 열두 살이던 큰아이가 몸이 아파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팠다. 세상사를 외면해 왔다는 죄책감이 컸다. 어려운 영화라 수입이 안 될까봐, 수입에 ‘수’자도 모르면서 일본에 찾아가 영화를 사 왔다.”

-엣나인필름 필모그래피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이 유난히 많다.
“지금처럼 암담한 세상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긴 싫다. 나를 흔드는 건 사회에 잔잔하나마 파문을 일으킬 영화다. ‘남영동 1985’(2012, 정지영 감독)를 투자·배급한 것도 군부 독재 고문 사건에 대해 나부터 제대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3년 전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을 열면서, 연간 5억원 손실은 각오했다고.
“다른 멀티플렉스 극장 수익으로 메꾸는 거다. 탕감할 부채가 많다. 사무실 벽에 2026년까지의 부채 상환 목표액이 월별로 붙어 있다. 혹자는 ‘돈 버는 상업영화나 하라’고 그러는데, 상업영화는 돈에 끌려다닌다. 인디영화·예술영화는 다르다. 수입할 때도 돈 벌 생각 없이 덤빈 덕분에 발굴한 영화가 많다. ‘히어 애프터’(5월 12일 개봉, 매그너스 본 혼 감독)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찾아낸 신인 감독 영화다. 마음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돌란 감독 영화를 처음 봤을 때처럼. 우리나라에선 이런 영화 못 만들잖나.”

-왜 못 만들까.
“관객 눈높이를 키워야 할 극장이 ‘지루하다’ ‘흥행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로 상영하지 않으니까, 아예 만들어지지도 않는 거다. 하지만 지루함보다 기다림이랄까. 찬찬히 기다리면 소소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요즘은 ‘적자를 보더라도 외화 수입을 그만하고 아트나인을 더 확장하는 게 낫지 않나’ 고민한다. 수입사는 워낙 많잖나. 나까지 경쟁에 가세해야 할까? 일본 예술영화 전용관 이미지포럼처럼 관객 시야를 넓히는 큐레이팅에 힘쓰는 것도 멋진 일이다.”

-핑크영화제부터 아트나인 벼룩시장까지, 관객과 ‘놀 줄 아는’ 영화사로도 유명하다.
“우리 공간에서 사람들이 웃고 즐길 때가 행복하다. 영화제에서만 하던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한 극장이 씨너스 이채다. 감독과 관객이 소통할 수 있도록 극장이 교량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먹고 놀 수도 있다면 극장만 한 놀이터가 어딨나.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화제도 하고 싶다. 좋은 다큐 한 편은 좋은 책 열 권보다 세상에 대해 더 많이 가르쳐 주니까.”

-영화수입사네트워크나 독립예술영화관모임뿐 아니라, BIFF 사태 등 영화계 대소사에 앞장서 목소리를 내는데.
“영화계에서 20년 넘게 일했으니까. 극장주나 수입업자는 영화인 사이에서 소외된 존재였다. 하지만 영화는 총체적 예술이다. 자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비즈니스하는 사람도 영화인으로 인정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누군가 그 틀을 깰 필요가 있다. 특히 BIFF에 대해서는 마음이 복잡하다. 부산시와 정관 개정 문제를 매듭지을 때까지, 영화제를 개최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프랑스 파리에 한국영화 전용관 세우는 게 소원이라고.
“다른 꿈도 생겼다. 쫄딱 망해도 좋으니 연출을 꼭 해 보고 싶다. 예순 살 넘으면 하려고 했는데, 시기가 당겨지고 있다. 사회 현상이 반영된 심리극을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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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어둠의 아이들` 스틸컷]

엣나인필름 수입 대표작

2016 ‘히어 애프터’ ‘트윈스터즈’

2015 ‘이웃집에 신이 산다’ ‘침묵의 시선’ ‘엘리펀트 송’ ‘아이 킬드 마이 마더’

2014 ‘마미’ ‘액트 오브 킬링’ ‘님포매니악 볼륨1·2’ ‘탐엣더팜’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2013 ‘로렌스 애니웨이’ ‘까밀 리와인드’ ‘더 헌트’

2010 ‘하트비트’ ‘어둠의 아이들’
“이 영화를 보고 가위에 눌렸다.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장기 밀매에 악용되는 이야기잖나.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죄책감이 컸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처음 그런 고민을 하게 해 준 영화다.”

엣나인필름 하반기 주요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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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업 포 러브` 포스터]

업 포 러브(Un homme ´a la Hauteur)

로랑 티라르 감독 | 장 뒤자르댕, 버지니아 에피라 | 8월 예정
첫 결혼에 실패한 후 마음을 추스르던 다이안(버지니아 에피라)은 “휴대전화를 주웠다”는 알렉산더(장 뒤자르댕)란 남자의 전화를 받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첫 만남의 자리에는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아티스트’(2011,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감독)의 배우 장 뒤자르댕이 남다른 키의 매력을 발산하는 로맨틱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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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톡홀름의 마지막 연인` 스틸컷]

스톡홀름의 마지막 연인(Den Allvarsa-mma Leken)

페닐라 어거스트 감독 | 미카엘 니크비스트, 스베리르 구드나손 | 10~11월 예정
갓 기자가 된 아비드(스베리르 구드나손)는 화가의 딸 리디아(카린 프란츠 크뢸로프)와 첫눈에 반하지만, 가난은 연인 사이를 갈라놓고 만다. 스웨덴 문호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소설 『시리어스 게임』(1912)이 원작이다.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단골 배우 페닐라 어거스트의 두 번째 연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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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단지 세상의 끝` 스틸컷]

단지 세상의 끝(Juste la Fin du Monde)

자비에 돌란 감독 | 가스파르 울리엘, 마리옹 코티아르, 레아 세이두, 뱅상 카셀 | 12월 22일 예정
‘마미’(2014)로 제67회 칸영화제 최연소 심사위원상을 거머쥔, 스물일곱 살 자비에 돌란 감독의 신작. 프랑스 천재 연출가 장 뤽 라가리스가 쓴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자신의 불치병을 알리려 하는 젊은 작가(가스파르 울리엘)의 반나절 동안의 이야기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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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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