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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창간 20주년기념 재계2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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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20년은 기업들의 영토획정기였다. 60연대 후반의 개발붐과 더불어 수많은 기업들이 얼어나고 없어지고 흥하고 쇠해 재계의 구획정리가 이루어 졌다. 맨 주먹에서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올라선 기업이 있는가 하면 선두그룹에서 시대의 흐름을 놓쳐 까마득히 뒤쳐진 기업도 많다.
65년도에 이른바 10대재벌로 손꼽히던 그룹은 삼성(이병철), 삼호(정재호), 럭키(구인회), 대한(설경동), 개풍(이정림), 삼양사(김독수), 금성(현 쌍룡·김성곤), 화신(박흥식), 판본(서갑호), 동양(이양구) 등.
이중 현개까지 10대재벌로 남아있는 것은 삼성·럭키·쌍룡 등 3개에 불과하다.
20년의 세월동안 재계의 부심이 그만큼 무상했다는 얘기다.
65년도 재계의 스타는 신진의 김창원씨.
이해 정부의 자동차공업일원화조치에 따라 새나라 자동차가 불하됐다.
잡았다하면 자동차산업을 독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공개입찰에선 삼미의 김두식씨가 이겼으나 한 실력자의 입김으로 삼미는 낙찰을 포기했고 63년에 국산1호차 신성호를 내놨던 신진의 김창원씨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김씨는 이후 하동환자동차·한국기계·경향신문 등을 인수하면서 재계정상을 향해 줄달음치다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65년 재계의 스타 신진의 김창원씨>
또 하나의 노다지였던 정유에서 걸프가 출자한 유공이 떼돈을 벌고있던 66년, 제2정유의 실수요자공모가 실시됐다.
내노라하던 기업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한국화약(김종희), 롯데(신격호), 대한증권(송대정), 판본(서갑호), 한양(김연준), 럭키(구인회)가 경쟁에 참여했다.
온갖 줄이 다 동원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럭키가 티킷을 땄다.
박정배 대통령과 대구사범동문인당시의 숨은 실력자 서정귀씨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씨는 호남정유의 사장으로 앉는다.
한국화약은 이후 절치부심, 69년 제3정유(오늘날 경인에너지)를 따냈지만 후발의 핸디캡을 메우지 못했다.
이때 또 하나의 빅 이벤트는 이른바 냉간대 세간 싸움.
당시 철강업계를 독점하고있던 한국철강(산영술)에 무명의 권철현씨가 도전장을 냈다.
구식의 열간압연방식에 맞서 신식의 냉간압연방식을 들고 나온 것이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권철현씨는 최신식 냉간압연공장을 지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연합철강이다. 권씨는 철판으로 돈을 벌어 재계의 스타로 올라섰고 신씨는 떨어진 별로 사라졌다.
그러나 영화도 잠깐, 정치기상도의 변화와 함께 권씨는 76년 외화도피혐의로 구속되고 77년 사업체를 모두 국제그룹에 넘기는 비운을 맛보게된다. 그 국제도 최근 정리되면서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에 넘어갔다. 60년대의 개발붐과 함께 각광을 받던 시멘트도 격전지였다.
금성방직과 대평방직을 소유, 면방그룹을 구축했던 김성곤씨와 자유당 5인조의 멤버로 왕년에 건설업계를 좌지우지하던 중앙산업에 조성철씨가 맞붙었다.
승부는 김성곤씨의 승리로 쉽게 가려졌고 김씨는 면방에서 시멘트그룹(쌍룡)으로 탈바꿈해 성장가도를 달리게된다.
이때 김씨가 매각한 금성·대평방직은 박용학·최성모·이상정씨 등을 주축으로 하는 당시의 현찰갑부 삼화빌딩 5인조의 대한농산으로 넘어가 세인들을 놀라게도 했다.
60년대의 개발붐과 월남경기는 새로운 스타들을 양산해냈다.
경부고속도로로 대표되는 건설경기를 타고 정주영(현대건설), 최준문(동아건설), 이재준(대림산업), 김용산(극동건설), 조정구(삼부토건)씨 등이 이름을 날렸고 월남에서 수송용역을 독점, 떼돈을 번 조중훈(한진)씨는 69년 대한항공의 인수로 스타덤에 올랐다.
현대는 70년대 들어 중동경기와 함께 조선·건설 등 덩치 큰 승부에서 위력을 발휘하면서 일약 국내 제1의 재벌로 부상했고 한진도 순조로운 항진을 거듭, 재벌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새로운 유망업종으로 떠올랐던 원양어업에서는 심상준(제동산업), 이학수(고려원양)씨가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의 수출주종품이던 합판·가발·생사 등에서는 각각 강석진(동명목재), 최준규(서울통상), 김지태(한국생사)씨 등이 위세를 떨쳤다.
이밖에도 폴리에스터의 선경(최종건), 나일론의 코오롱(이원방)·동양나일론(조홍제), 아크릴의 한일합섬(김한수)·태광기업(이임용) 등이 섬유업계의 강자로 등장했다.
60년대 성장의 그늘에서 조락해간 별들도 적지 않다.
한국최초의 재벌로 불리던 태창방직(백남일)과 삼성과 재계랭킹 1-2위를 다투던 삼옹그룹(정재호), 자유당 5인조의 중앙산업(조성철) 등이 일찍 재계전면에서 사라졌고 뒤를 이어 천우사(전택보), 화신(박여정), 동립산업(함창희), 한국철강(신영술), 인천제철(이동준)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출 제1추의와 중동경기, 두 차례의 오일쇼크과 중학학투자열풍 등으로 파란 많던 70년대의 기업사에서는 「대우신화」의 주인공 김자중씨가 단연 돋보인다.
한성실업무역부장을 내놓고 67년 5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대우실업을 세운 김자중은 70년대 초 결정적인 찬스를 포착했다.
미국이 조만간 섬유류수입을 규제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쿼터제가 실시되기 바로 전해인 71년 채산성을 불문하고 실어내기 작전에 나섰다.
72년 미국의 섬유쿼터제가 실시되고 그는 실적기준에 따른 국내최대의 수출쿼터를 따내 대재벌의 발판을 낳았다. 쿼터만 있으면 앉아서 돈벌 수 있었던 시절, 거기에다 첨단적 금융기업까지 교묘히 구사하며 「기업사모으기」에 나서 창업 후 불과 10여년에 국내정상급 재벌의 위치를 확보했다.
대우의 성장드라마는 당시 재계의 「경이」로 받아들여졌고 김우중씨는 70년대 야망에 부푼 「무서운 아이들」의 우상이 됐다.
70년대 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물거품 같이 사라진 기업인으로는 삼기물산의 이준석씨가 있다.
OB와 크라운으로 양분된 맥주업계에 이씨가 도전장을 낸 것은 72년. 불가능하리라는 판단을 뒤엎고 한독맥주를 세워 이젠 백맥주를 내놓는 그는 우여곡절 끝에 전량수출조건을 떼어내고 내수판매길을 트는데는 성공했으나 이것이 결국은 몰락을 자초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OB·크라운의 연합전선을 뚫지 못하고 결국 시장확보에 실패한 한독맥주는 외조주식을 담보로 한 부정대출사건을 일으키고 문을 닫고 말았다.
70년대 가계는 수출과 해외건설, 중화학투자 열기 속에서 대형화의 길로 줄달음쳤다.
수출지상주의 속에서 태어난 종합상사는 재계판도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69년 전자공업참여를 신호로 다시 재계정상의 능력을 풀가동하기 시작한 삼성이 75년5월19일 종합상사 제1호를 따내면서 같은 해 대우·쌍룡·국제상사·한일합섬이 종합상사자격을 얻어냈고 76년에는 고려무역과 효성물산·반도상사(현럭키금성상사)·선경·삼화·금호실업이, 78년에는 현대종합상사와 율산실업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종합상사지정을 계기로 이들 기업은 수출금융이란 특혜자금을 무기로 기업가지치기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맹렬한 속도로 자라났다.
종합상사 지정 후 4∼5년 동안 재계는 삼성·현대·럭키금성·대우의 이른바 4대그룹을 정점으로 재편과정을 겪었다.
70년대 중반 오일쇼크 이후 찾아든 중동경기는 막대한 오일달러를 국내로 끌어들이면서 이른바 「단군이래의 호황」을 구가하고 건설업체의 덩치를 엄청나게 부풀려 놓았지만 부동산 투기바람과 함께 마구잡이식의 진출이 빚어낸 후유증은 기업자체는 물론 아직까지 우리 경제에 주름살을 남기고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부실기업 문제가 이때 싹튼 것이다.
70년대의 기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율산의 신선호씨를 필두로 한 이른바 「무서운 아이들」의 출현.
75년 자본금 5백만원의 율산실업을 세운 신선호씨는 기발한 기동력과 아이디어로 중동에서 큰 돈을 벌어 불과 3년만인 78년 종합상사자격을 따내고 제2의 대우를 눈앞에 바라볼 만큼 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확장은 때마침 겹친 금융긴축의 여파로 자금사정을 악화시켰고 수출실적은 떨어졌다.
79년 종합상사자격박탈을 신호로 금융지원은 중단되고 신씨는 수많은 억측을 불러일으키며 대출과정의 부정혐의로 구속, 율산4년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이보다 규모는 작지만 제세산업의 이창우, 대봉의 김병만, 원기업의 원길남씨도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혜성처럼 나타나는가하더니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70년대 중반이후 불어닥친 중화학투자열풍은 정부와 기업의 과잉의욕, 갈팡질팡하는 정책의 와중에서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종합상사지정 계기 재계판도를 재편성>
국제경쟁력확보라는 명분아래 걸핏하면 동양최대를 내세웠던 대형화경쟁은 결국 막대한 외국빚과 유휴시설을 남겨놓았다.
세계최대의 단일기계공장을 꿈꾸다 한국최대의 부실기업이 된 현대양행의 종합기계공장(오늘날의 한국중공업)이 그 대표적 케이스. 70년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몰락한 기업도 많다.
자동차왕국건설을 노리던 김창원씨(신진자동차)는 미GM사와의 지나친 불평등계약과 정치기상도의 변화로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게됐다. 7O년대 초까지 수출1위를 자랑하던 동명목재의 강석진씨도 불황과 가정불화로 당대에 몰락하고 말았다.
이밖에도 세무사찰 한방에 쓰러진 삼학소주(김상두), 원양어업의 개척자 제동산업(심상준), 생사수출의 한국생사(김지태), 현금왕 원풍산업(이상정), 집안단속에 실패한 호남전기, 5·16거사의 참여자로 위세를 떨치던 고려원양(이학수) 등이 사라지거나 빛을 잃었다.
70년대 들면서 기업사에 굵직한 선을 그은 창업주들의 잇단 타계로 대권승계가 줄을 이었다.
70년 연초 럭키금성은 구인회씨의 타계 후 대권을 장남 구자경씨에게 넘겼고 이후 선경 (최종건→최종현), 코오롱(이원만→이동찬)도 변화를 겪었다. 이들 후계자들은 사실상 창업 때부터 참여한 케이스로 따로 1·5세로 지칭된다.
이밖에 OB(박두병→박용곤), 쌍룡(김성곤→김석원), 한국화약(김종선→김승연), 한일합섬(김한수→김중원), 동아건설(최준문→최원석), 삼미(김두식→김현철) 등 굵직한 그룹의 얼굴이 바뀌었다.
79년 오일쇼크와 함께 10·26사태로 정기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세계경세가 침체상태에 빠지면서 팽창을 거듭하던 재계는 심각한 몸살을 앓게된다.
늘어난 몸체를 주체하기 힘들어진 재계는 자의반 타의반의 감량경영에 들어가야 했고 이를 감당 못한 기업들은 「부실기업」으로 낙인이 찍혀 회사가 넘어갔거나 구제금융으로 근근이 연명하게됐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판에 82년에 터져 나온 이·장사건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결국 일신제강(주창균)과 공영토건(변강우)을 쓰러뜨렸다.
83년 잇달아 터져 나온 명성사건과 영동개발진흥사건은 또 한번 경제를 뒤흔들었고 80년대 관광레저붐을 타고 명성그룹을 쌓아올리던 김철호씨는 세무사찰을 받고 생체해부 된다.
해외건설경기와 해운업계의 불황은 심각한 여과를 미쳤다.
70년대 국내건축붐과 중동경기로 공전의 호황을 구가했던 건설업계는 중동경기의 위축에다 과다경쟁이 빚은 덤핑수주로 일거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기회포착·변신이 정상지키는 요인>
특히 막차를 탄 기업들의 피해는 심각했다.
두강기업·삼호·남광토건·진흥기업이 위탁경영형태로 주인을 바꾸었고 한양·라이프·삼익주택 등 70년대 말기 신흥재벌로 발돋움하던 건설업체들은 대부분 부실기업의 불명예를 탈피하기 위해 악전고투중이다.
해운통폐합이란 극한적인 물리요법을 감수해야만 한 해운업계는 아직도 회생전망이 보이지 않은 채 대한선주·범양전용선 등 과거의 강자들도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대한전선·효성·금호·삼미 등 중위권 그룹들이 군살을 빼고 새 체급에 적응하는 과정을 겪는 가운데 85년 초 느닷없이(?) 몰아친 국제그룹 해체는 재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연간매출 2조원이상, 국내그룹랭킹 7∼8위의 국제그룹해체는 기업이 어느 정도 몸이 커지면 정부가 뒷감당을 해줄 것이라는 신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대그룹들을 전전긍긍케 만들었다.
80년대 들어 몸체가 부쩍 커진 그룹은 선경. 유공 인수를 계기로 일약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재벌로 부상했다.
기업의 경쟁에는 휴식이 없다. 지난 20년 동안의 극심한 경쟁 속에서 계속 10대그룹의 영예를 지켜온 삼성·럭키금성·쌍룡이나 그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재계정상권에 올라있는 현대·대우·선경, 이밖에 착실한 성장을 거듭해온 한진·롯데·한국화약·두산·코오롱 등의 영화가 20년 후에도 이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박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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