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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꽃게와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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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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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남의 집 담을 넘어가 물건을 훔치는 걸 도적질이라고 한다. 한국의 서해 바다에 떼로 밀고 들어와 꽃게를 비롯해 각종 어족 자원의 씨를 말리는 일부 중국 어민의 행동은 도적질이다. 영토의 침범자들은 거칠고 난폭한 데다 한국의 공권력을 겁내지 않는다.

그들로 인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한 중국의 위상이 무너지고 있다. 중국엔 법과 시장질서를 지켜서는 먹고살 수 없는 인민들이 그렇게 많은 건가. 최근 남미와 아프리카 해안, 동남아시아 각국 앞바다에서 중국 어선들이 격침되거나 나포됐다. F-16 전투기가 발진하고 기관총을 탑재한 감시선이 선보였다. 모두가 오성홍기(五星紅旗)를 내건 바다의 도적을 잡기 위한 것이다.

서해의 무법자들 때문에 한국의 어민들은 피눈물을 쏟고 있다. 그저께 통화한 연평도 어촌계장 박태원(56)씨는 “오늘 산에 올라가 육안으로 세어보니 1.5㎞ 앞 북방한계선(NLL)상에 중국 어선 26척이 군단처럼 모여 있다” “중국 배들이 우리 해역을 24시간 들락날락하며 꽃게를 싹쓸이해가도 해경은 제대로 단속을 못한다”고 말했다. 해경은 해군의 통제를 받는다. 해군은 북한군과 충돌을 우려해 해경의 NLL 접근을 막으려고 한다. 불법 선단은 우리 해군과 해경의 미묘한 틈새까지 파고들어 서해 어장을 유린하고 있다.

해군은 연평도 우리 어선의 조업시간과 조업구역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국민의 생명 보호가 명분이지만 생활 터전이 뿌리 뽑히는 어민의 현실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박태원 어촌계장은 “중국 꽃게잡이 어선은 18년 전부터 등장했는데 올해처럼 사납고 대담한 적이 없다. 우리 집에 들어온 도둑들은 마음껏 활개치는 반면 주인은 손발이 묶여 있는 격”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열흘 전 박씨의 동료들이 불법 조업선을 직접 나포한 것도 중국이 나쁘지만 한국 정부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중의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는 “ 350세대가 일하는 연평도 꽃게잡이 어선의 매출이 지난해 6억원에서 올해 2억50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고 말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주변국 외교공작회의’에서 “친밀(親密)·성실(誠實)·혜택(惠澤)·포용(包容)의 주변국 외교이념에 따라… 주변 국가가 우리를 더 우호적이고 친근하게 대하며 더 지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주변국 외교 원칙은 시 주석의 이 발언에 의해 친성혜용(親誠惠容) 네 글자로 정식화됐다. 연평도의 꽃게 문제는 친성혜용 중 ‘혜’에 해당한다.

시 주석은 혜를 “중국의 발전이 주변 국가들에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원칙”이라고 했다(시진핑, 『국정운영을 말하다』 361~365쪽). 꽃게에 관한 한 시진핑의 주변국 외교원칙은 빈말이 되어 버렸다. 꽃게 외교는 거창한 안보정책이나 경제교류, 문화사업이 아니다. 한국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고 다른 어떤 외교 형식보다 자극성이 강렬한 민생외교 영역이다.

요새 택시에 올라타면 서울의 운전기사들은 “왜 우리는 아르헨티나처럼 영해 침범 어선들을 격침시키지 않느냐”고 흥분한다. 무법무도하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부 중국인의 행태에 한국인의 피로감이 쌓여가고 있다는 신호다.

추궈훙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 2월 한·미 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체계 배치 논의가 시작되자 득달같이 국회로 달려갔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를 만나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나는 그때 추 대사의 언행을 주재국 정치권의 여야 균열선을 파고드는 무례외교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적극적 외교행위로 보기도 했다. 보이는 지리상의 경계와 보이지 않는 역사적 접점을 가장 많이 잇대고 있는 이웃 나라에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추궈훙 대사는 꽃게 문제에서도 사드 이상의 주의 깊고 민첩한 대처를 하기 바란다. 시진핑 주석에게 서해 꽃게의 폭발성과 민생외교의 중대성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꽃게 외교는 중국 당국의 어민들에 대한 준법교육과 예산 투입, 자체 단속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