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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쟁이 당신은 낙관주의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3호 34면

지각


국어사전 遲刻 [명사]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등교함


영어사전 lateness, tardiness, be late, be tardy


그 여자의 사전 그 여자의 벗어나고픈 습관, 고질병. 혹은 복통 유발원인. 1) 평생 반복된다. 2) 늘 결심은 하지만 성공적 실천에 이를 확률은 극히 낮다 3) 그래서 결심의 말은 늘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4) 그것에 대한 지적은 너무나 뼈아프게 다가와 “나도 잘 알고 있다고요”라고 마음속으로만 반항할 뿐 입 밖에 내어서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이어트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되는 것.


어디선가 쏴쏴 파도소리와 함께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해 휴가 때 갔던 바닷가에서 물속에 발을 담그고 밟던 모래의 느낌이 꿈결에 떠오른다. 그런데, 너무 자주 듣던 음악이다. 귀에 너무나 익은 이건…아차차! 기분 좋은 하루를 열겠다며 너무 낭만적인 알람소리를 정해놓은 게 문제였다. 알람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콤한 아침잠을 무려 15분이나 잤다. 그 여자는 오늘도 지각이다.


침착하자. 아직 나에게는 80분이 남아있다. 지체된 15분은 화장을 생략하는 걸로 보충할 수 있다. 산수가 이렇게 빨리 되는 적이 없다. 샤워하고 머리 말리는데 20분, 옷 입고 나서는데 5분, 버스와 지하철은 평균 45분. 그러니 무려 10분이나 여유 시간이 남아 있다. 우회 노선이 아니라 터널 통과 노선 버스를 타면 여기에 10분을 더 당길 수 있다. 오늘은 남들보다 빨리 가서 당당하게 앉아 있으리라.


그런데 샤워하고 거울을 보니 너무 추레해 보여 비비크림을 바르기 시작한 게 잘못이었다. 허여멀건 해진 얼굴로는 도저히 갈 수 없어 눈썹을 그리고, 아이라인을 대충 그렸다. 10분을 써먹었다. 아직 절망은 이르다. 그러나 옷장 속의 옷들은 이럴 때만 꼭 숨바꼭질을 한다. 옷장 구석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간신히 찾았지만 구깃구깃 하다. 채 데워지지도 않은 다리미로 슥슥 다림질을 하고 나선다. 다시 10분 경과. 여유시간 마일리지를 다 썼다. 그 여자는 유연하게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일찍 가는 건 포기하고 정시 출근만 하자.


아침의 현실은 냉혹하다. 분명 8분 간격으로 와야할 버스는 무려 13분 후에나 도착한다고 안내판에 뜬다. 직통 노선도 아니다. 그 여자는 이제 직장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버스 운영정책에 분통을 터뜨린다. 이제야 여자는 머릿속에 익숙한 기억을 떠올린다. 늦게 온 버스는 꼭 만원버스이고 그날의 교통상황은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는 것, 그리고 버스가 늦은 날은 지하철도 늦게 온다는 것이 수십 년 출근 생활에서 얻은 불변의 지각법칙이다. 그런데, 왜 지각하는 날 아침은 그 수십 년 경험으로 쌓아온 기억들을 까맣게 잊게 되는 걸까. 왜 그 여자는 그날 아침 자기에게는 최고의 행운만이 잇달아 펼쳐질 거라는 희망을 품는 걸까.


어떤 연구진들은 ‘지각쟁이들의 공통점은 낙관주의자들’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잘 가지기 때문에 늘 늦는다는 뜻이다. 낙관주의의 장점으로는 스트레스를 덜 느껴 심혈관계 질환이 줄어들고 생산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결국 장수하게 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지각하는 사이에 오그라드는 내 심장과 살살 밀려오는 복통과 회사에 가서 주눅 드는 마음, ‘난 역시 안돼’라는 자책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낙관주의로 얻을 플러스 수명보다는 마이너스가 훨씬 더 큰 것이 확실하다. 조금 더 오래 살지 않아도 되니 제발 지각 유전자 좀 없애게 해주는 약이라도 개발됐으면 좋겠다.


15분 지각, 오 신이시여. 어쨌든 이제는 또 다른 목표를 재빨리 세워야 할 때다. 그래 내일부턴 정말 우리 부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될 거야. 늦은 만큼 오늘은 정말 열심히 일할 거야. 낙관주의자의 최대 강점인 창의성과 팀워크의 화신, 그게 바로 나야. 사무실에 어떤 표정으로 들어가야 할까. 아픈 표정? 아니면 화난 표정? 미안한 표정? 가능한 한 최고로 비굴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마침 사장님과 맞닥뜨리는 또 하나의 지각 법칙을 다시 확인한다. 오늘의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절대 다시는 잊어선 안 된다.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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