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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표구업계 산 증인 이효우 대표 “풀 바르며 입에 풀칠하다 보니 어느덧 오십 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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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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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세가 기울어 입에 풀칠하려고 10대 후반부터 풀 바르는 일을 배웠다. 이효우(75·사진) 낙원표구사 대표는 자신의 50여 년 장인 인생을 구술한 회고록에 ‘풀 바르며 산 세월’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림이나 글씨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도록 여러 장치를 하는 표구는 조선시대에 ‘장황(裝潢)’이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받아들인 일본식 용어가 굳어버려 표구사가 됐지만 이제부터라도 장황이라 부르면 된다고 이 대표는 말문을 열었다.

작업현장 기록 남기려 구술 작업
『풀 바르며 산 세월』 책으로 나와
“싸게 빨리만 하려는 세태 아쉬워”

“뭐든 급작스레 꺾어버리면 안 되죠. 현대 한국 표구 1세대가 일본인 밑에서 배웠기에 그 전통이 남아있는 건데 바꿀 때가 됐죠. 표구는 알아들어도 장황은 낯설잖아요. 차츰 장황이나 배첩장이라 불러주면 언젠가 표구란 단어가 사라지겠죠.”

이 대표는 구술 작업 제의가 왔을 때 나중으로 미루려 했다. 그가 일을 배운 상문당 박봉환 선생은 돌아가셨지만 동산방 박주환 선생이 살아계시는데 먼저 나서기가 부끄러웠다. 몇 번 사양한 끝에 덜컥 일을 저지른 건 표구의 저질화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낙원고서화보존연구소를 이끌며 현장에서 보고 느낀 기록을 부족하더라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에 팔을 걷어붙였다.

“요즘 사람들은 무조건 싸게 빨리만 하려 들어요. 풀을 지극정성으로 잘 쒀야 하고, 건조 판에 붙여 자연스러운 신축 작용을 여러 차례 겪도록 하는 등 시간과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작업인데도 저렴함과 신속함만 찾으니 날림이 될 수밖에요. 장황을 하는 이는 서화의 생명을 다룬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작품을 맡기는 분들은 제발 배첩장과 의논을 하세요. 충분히 상담하고 얘기를 나누는 과정이 장황의 시작이자 노른자위이고 인생공부입니다.”

부록으로 붙인 ‘문화재 보존 관리학 연습’ ‘표구의 용어와 재료 그리고 작업 과정’은 이 대표가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강의한 교재로 이 분야에 입문하려는 이에게 교과서 구실을 한다. 책 사이사이에 들어간 도판들은 그가 모은 시전지(詩箋紙)다. 지난 2010년 열었던 ‘예쁜 옛날 꽃편지-조선시대의 시전지’에서 소개했던 소장품인데 그는 “시전지 쓰기 운동을 벌이고 싶다”고 했다.

가나문화재단이 기획한 ‘문화동네 숨은 고수들’의 두 번째 책으로 나온 『풀 바르며 산 세월』(곽지윤·김형국 엮음) 발간을 기려 10일부터 서울 평창 30길 포럼스페이스에서 기념전이 열린다. 이 대표가 수장해온 옛 선인의 시(詩) 글씨를 손수 꾸민 30여 점을 선보인다. “풀솔과 붓을 들 수 있는 그날까지 일터를 떠나지 않겠다”는 원로 배첩장의 장황 사랑이 명품 족자와 현판에서 빛난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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