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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공이냐 임정이냐-미서「정통성」부인…정부수립 "물거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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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해방정국에서의 정치논쟁은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선포와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요인의 귀국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왜냐하면 이들이 객관적인 정세를 떠나 하나의 정부로서 행세했으며 양자 사이의 논쟁의 성격도 정부적인 차원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이나 임정 어느 것도 연합국 또는 미군정으로부터 정식정부로 인정받지 못해 해방정국에서 명멸한 수많은 단체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고 말았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는 이 두단체가 정부로서 기능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이들이 정부로서의 기능을 정지당했기에 이에 관련되었던 많은 정치인들이 해방정국에서 그 주역의 자리를 내놓을수 밖에 없었다.
치안유지 업무에 주력하던 건준은 미군의 상륙이 임박하자 이들과 절충할 민족총의의 집결체가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논리하에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덧붙여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각도마다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지방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한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건준의 지도부는 더욱더 정부의 수립을 갈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9월6일 하오 9시 경기여고 강당에서 이여성의 개회선언으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 의장에 여운형, 부의장에 허헌을 각각 선출했다.
전국에서 1천여명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선언하여 인공의 선포가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임시대리 편법으로 건준위주 내각구성>
인민위원은 의장 여운형과 부의장 허헌을 포함한 5명의 전형위원이 전형하여 선출한 것으로 55명의 인민의원과 20명의 후보위원, 그리고 12명의 고문이 발표되었다. 이날 발표된 명단을 보면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용설 홍남표 김병노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전 최용달 이강국 김용엄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이승엽 강기덕 조두원 이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봉식 정종근 조동우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최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이 인민위원으로, 최창익 황태성 홍덕우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이 후보인민위원으로,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항규 김상은 장도빈 김관식 김용기 이영이 고문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인공은 서기국 명의로 인민위원이 선출된 경과를 밝히는 성명서를 통해 『민족적 총역량을 정비·집중한 독립국가』로서 제1보를 내딛게 되였다고 발표했다.
인공은 9월14일 오후 3시에는 정부부서를 발표하고 이를 비라로 만들어 시내에 살포했다. 이에 의하면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국무총리에 허헌, 내정부장에 김구(임시대리 허헌), 외교부장에 김규식(임시대리 여혼형), 군사부장에 김원봉(임시대리 김세용), 재정부장에 조만식, 보안부장에 최용달, 사법부장에 김병노(임시대리 허헌), 문교부장에 김성수(임시대리 이만규), 선전부장에 이관술, 경제부장에 하필원, 농림부장에 강기덕, 보건부장에 이만珪, 체신부장에 신익희(임시대리 이강국), 교통부장에 홍남표, 노동부장에 이주상, 서기장에 이강국, 법제국장에 최익한, 기획국장에 정백이었다. 임정요원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임시대리라는 편법을 써 건준위주로 짜여졌다.
이로 인해 인공은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간에 벽보내각, 또는 비라내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공에서 인민위원 또는 정부요인으로 발표한 사람의 상당수가 국내에 거주하고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인공과는 관계가 없음을 발표해 정치문제외에도 「명의 도용」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마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인공이 발표한 「명의 각료중에서 5명이 임정요인으로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고 앞서 밝힌 것처럼 권동진 오세창 김성수 김병노 등은 인공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인공으로서는 민족해방을 위해 일제와 투쟁을 계속한 국내·국외의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했다고 주장했으나 반론의 여지도 없지않았다.
즉 반대측에선 『건준의 사람을 다 내세워도 세상이 신용치 않으니까 해외의 우리 혁명지도자명의를 도용하고 국내명사의 이름을 빌어 조각』했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인공 스스로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가장 진보적이며 가장 혁명적인 세력이 그것을 영도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건준을 핵심으로 하여 인공을 이끌어갈 것이라는 점을 암시했다.
이 때문에 인공의 조각은 『출석할수 없고 안할 사람들의 이름을 일부러 넣어 마치 민족 전체의 의사인 것처럼 꾸미는 몰염치한 도배들의 장난』이라고 매도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인공선포후 이들은 각지방 인민위원회의 조직에 착수하여 지방의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운영했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활동도 미군정이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는 바람에 정지되고 말았다.
임정의 경우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었을때 임정요인들은 개탄을 금치못했다. 참전을 위한 준비도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아니라 전쟁에서 두드러진 공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장차 국제간의 협상에서 자신들의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개탄한 것이었다.
이처럼 앞날을 예감한 임정주석 백범 김구는 9월26일 장개석과 면담하고 그가 미국정부와 협의해서 임정을 최소한 「비공식혁명과도정권」으로 묵인하여 환국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백범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될수 없는 것이었다. 미 국무성에서는 이미 어떠한 정치단체에 대해서도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는데다가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에 의해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방후 즉시 독립이 실현되지않아 불안이 고조되어 터질것만같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미군정에서는 한때 임정을 정치적 구심체로 활용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즉 임정을 연합국의 후원하에 임시정부로서 귀국하게 하고 한국민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이를 활용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임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정부의 기존방침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미국은 해외독립운동단체들의 난립을 들어 어느 한단체가 한민족전체를 대표할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지도자명의를 도용 민족전체의사 위장>
따라서 임정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11월23일 귀국한 백범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들은 정부를 가져왔지만 군정이 있는 한 우리정부는 아직 외국과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 우리들은 개인자격으로 들어왔다』는 간단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치활동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진과 2진으로 나뉘어 귀국한 이들 임정요인들을 보면 주석 김구(71세), 부주석 김규식(70세), 내무부장 신익희(53세), 외무부장 조소앙(59세), 군무부장 김원봉(48세), 재무부장 조완구(65세), 법무부장 최동오(63세), 문화부장 김상덕(48세), 선전부장 엄항섭(45세), 참모부장 유동세(65세), 의정원의장 홍진(68세), 의정원의원 이시영(78세), 황학수(65세), 조성환(70세), 장건상(60세), 김붕준(60세) 등이었다.
백범은 해주태생으로 귀국당시 34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한 몸이었다. 어려서부터 반일애국사상에 투철했던 그는 한때는 동학군에 가담하기도 하고 민비살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일본군을 살해했는가 하면 35세때에는 총독 사내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사전에 발각돼 7년간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그는 중국에 망명하여 임정과 인연을 맺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의거와 이봉창의사의 일본 천황 저격의거 등이 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임정의 경무총감·내무총장·국무총리·대통령 등을 역임하고 주석으로서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은 것이다.
부주석인 우사 김규식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잠시동안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4년 망명길에 오른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여운형 장덕수 신석우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만들었고 파리·모스크바 등지를 다니며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망명해있는 항일단체들을 통일하기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혁명당 등을조직하여 항일투쟁에 주력했다. 우사는 1941년 임정에 참가하여 그 부주석이 됨으로써 통일전선을 더욱 확대시켰고 해방후 임정요인 제1진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임정이 귀국하자 국내 정국에 판이한 양상이 나타났다. 즉 임정지지를 내세우고 결성된 많은 정당들이 정신적인 지주를 만나 인공타도의 기치를 더욱 높이들게 된 반면 인공을 지지한 정당의 경우 임정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임정에 대한 공세를 더욱 치열하게 전개했다.
임정의 귀국으로 가장 활기를 띠게된 측은 한민당으로 이들은 국민대회준비회를 통해 임정을 절대 지지한다는 내용의 포스터를 만들어 시내에 붙였는가 하면 국민대회준비회를 내세워 3당 모임을 알선하여 임정을 지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즉 국민당·한민당·조선공산당(장안파) 등 3개정당이 국민대회준비회의 알선으로 11월24일 동아일보사에 모여 임정의 『정치적·외교적 활동을 전면적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날의 참석자를 보면 국민당측에서 안재홍 백홍균 엄우룡 한규연 박용희 김인현 민대호가, 장안파 공산당측에서 이영 최익한 황욱 윤형식 서병인 송진경이, 한민당측에서 송진우 김병노 백관수 백남훈 원세훈 홍성하가, 그리고 알선측인 국민대회측에서 김준연 서상일 강병순 장택상 설의식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날의 결의를 바탕으로해서 12월19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개선 전국환영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인공은 진주한 미군의 활동이 일본군의 무장해제업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군정을 실시하고 정부로서의 기능도 수행하자 당황했다. 인공으로서는 서둘러 정부의 모양을 갖추어 미군측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어떠한 정치단체도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기본지침을 수행해야 하는 미군측으로서는 인공의 접근이 마음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연극행위 중지하라 미군정, 인공에 촉구>
그리하여 10월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성명을 통해 인공은 『권위와 세력과 실제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에게 현실을 각성하고 연극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이로써 인공은 부분적으로 수행해오던 정부로서의 기능을 정지당하고 말았으나 인공의 주축을 이루었던 조선공산당, 특히 재건파는 꾸준히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조선청년총동맹(청총) 등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인공의 사수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인공의 핵심요소인 조선공산당은 해방직후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여왔으나 내부적으로는 재건파와 장안파가 당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 이념투쟁을 전개한 정당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이며 당의 주류인 재건파를 이끌던 박헌영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상해에서 망명청년들로 구성된 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공산주의활동을 하다가 국내조직의 사명을 띠고 국내에 돌아와 조직활동을 전개, 1925년 조선공산당 청년회와 조선공산당을 조직했던 것이다.
1926년 공산당사건이 발각되자 그는 투옥되었으나 감옥에서 광인행세를 하여 정신이상자로 판단받고 출옥, 그후 모스크바에 가서 공산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후 그는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조선공산당재건의 사명을 받고 1932년 상해로 돌아와 활동을 벌이던 중 1933년 4월 상해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6년간 복역을 마치고 나온 그는 광주근처의 벽돌공장에 은신하면서 경성콤그룹과 관련을 맺으며 조직활동을 벌이다 8·15해방을 맞이했다.
해방후 그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통해 현상의 급진적인 변혁을 꾀했고 그 일환으로 인공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심지연<경남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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