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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공화주의 실현하는 보수정치 세력 필요"…새로운 정치결사체 합류 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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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 후 정치 행보를 자제했던 유승민 무소속 의원이 31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법학관에서 `경제위기와 정치의 역할`을 주제로 열린 강연을 하기 위해 자리에 착석해 있다. [사진=뉴시스]

유승민 의원은 31일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를 지향하는 보수 혁명이 필요하다”며 “그걸 하기 위해선 공화주의(共和主義) 가치를 실현하는 보수정치 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이날 성균관대를 찾아‘경제위기와 정치의 역할’을 주제로 2시간 특강을 했다. 새누리당이 공천파동으로 4ㆍ13 총선에서 참패한 이후 당 상황이나 정치 현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오던 그였기에 취재진의 관심이 쏠렸다.

유 의원은 각종 경제위기 지표들을 보여주면서 불평등, 불공정, 양극화 현상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꼽았다. “불평등의 심화는 정치시스템을 부패시키고 경제성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 경제현실에 굉장히 가까운 진단”이라고 말했다.

유 의원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불평등이 좌파들의 이야기라며 말을 안했는데 최근 그들도 불평등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한다”며 “경제적 불평등이 심할수록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도 커지고, 우리나라도 이미 이런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의 평등에 집착하지말고 기회의 평등만 잘 보장되면 된다는 건 상당히 과장된 주장”이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 등 보수 단체에서 ‘결과의 불평등을 시정하는건 사람들의 동기를 왜곡시켜 오히려 성장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의 불평등을 방치한 채 기회의 평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유 의원은 지난해 대통령직속 국민대통합위원회가 비공개로 낸‘한국형 사회갈등 실태진단’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폭발 일보 직전의 초갈등 사회’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이 등장한다”며 “박근혜 정부 시절의 국민대통합위원회가 물론 외부 전문가들한테 맡긴 연구 결과이고 이런 결론이기 때문에 공개가 안됐는지 몰라도 이 지적 자체는 굉장히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에서 “경제력에 따른 계층간 갈등이 어떤식으로든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면서다.

유 의원이 내놓은 어두운 전망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유 의원은 “이대로 가면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인다”며 “계층과 신분이 상속되는 세습자본주의가 되고, 능력주의가 파괴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내부로부터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해법’에 대한 파트로 넘어간 유 의원은 “왕도는 없지만 정도는 있다”며 “지금 대한민국은 총제적인 국가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꺼내든 건 시장경제 체제의 수술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자유시장 경제는 진정한 의미의 시장경제가 아니다”라며 “그동안 우리의 시장경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공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특히 기존의 수구보수 세력에 대해 “(경제) 성장이 불평등을 치유한다고 우기고, 재벌·대기업을 살려야 한국경제가 산다며 마치 한국경제 전체를 재벌과 대기업의 인질인 것처럼 해왔다”며 “그 논리는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한 운동장(level playing field)으로 만들어주고, 친재벌 정책을 친시장 정책으로 바꿔야한다”며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 기업을 징벌할 수 있는 제조물책임법, 집단소송제는 친재벌ㆍ친기업은 아니지만 친시장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유 의원은 “제가 사회적 경제주의를 주장한다고 저보고 사회주의자라고 하는데 이건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윤만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경제조직을 배척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가 19대 국회에서 대표발의했던 사회적경제기본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기획재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유 의원은 “사회적 경제란 말에 대해 이념적 잣대로 알러지 반응을 보일 필요가 전혀 없다”며 “사회적 경제는 시장경제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다. 국가와 시장이 사회적 책임을 다 못지고 있는데 사회적 기업을 통해 일자리와 복지문제가 상당히 해결되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9월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 금지법)과 관련해 유 의원은 “제가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통과시켰는데, 그 법의 적용 범위가 형평에 안맞다는 문제제기는 일리가 있지만 그걸 시비삼아 법 자체를 없앤다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김영란법이 경제에 나쁘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사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건 우리 사회가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정말 도움이 안된다”며 “보수든 진보든, 정치가 시대의 변화 요구에 부응하는 개혁에 나서지 못하고 현상유지를 하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희망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에는 교수와 학생 300여명이 참석했다. 유 의원은 학생들에게 “결국은 정치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며 “여러분이 정치를 아무리 싫어해도 정치가 여러분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현실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로를 선택하는 게 정치의 소명인데, 저는 제가 왜 정치를 하는지, 보수가 뭔지 고민했다”며 “저성장, 양극화, 불평등, 불공정 등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20년 이상 용감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유능한 정치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보수 개혁의 방향으로 꺼내든 가치는 ‘공화주의(共和主義)’다. 유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이 5ㆍ16 쿠데타 이후 만든 군사정권과 그때 만든 정당이 공화당이라서 사람들이 공화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는것 같다”며 “공화주의의 핵심이념은 자유, 법치, 공공선, 시민의 덕성(virtus), 애국, 참여, 정치의 부활”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화란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굴종과 주종적 지배를 강요당하지 않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평등한 시민들이 모여서 하는 정치체제”라며 공화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소 어렵고 무거운 내용의 강연이었지만 학생들은 대체로 경청했다. 1시간 15분 강연이 끝난 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학생들 20여 명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한 남학생은 “제가 기존에 알던 보수와 의원님이 말하는 보수가 좀 다른 것 같다”며 “왜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는지 알고 싶다”고 물었다. 유 의원은 “학생이 생각하는 보수라는 고정관념 아래 저나 제 동료 의원 중 변화를 바라는 정치인들을 가둬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출마 일화를 꺼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당시 당 대표로 선출됐고 유 의원은 2등으로 최고위원이 됐다. 같이 지도부에 들어갔던 사람이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나경원 의원이다. 유 의원은 “그때 당이 굉장히 젊었다”며 “제가 2000년에 입당해 2011년 전당대회 출마할 때 (출마선언문을 보고) 언론에서 ‘좌클릭 선언’이라고 했는데, 민생ㆍ경제ㆍ사회 문제에 대해선 기존의 한나라당과 다른 포지션으로 갔던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지금도 그때 생각과 똑같고, 보수가 흔히 욕먹는 보수가 되선 보수정당에도 안 좋고 나라에도 안좋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자꾸 바꾸자고 주장하고 우리가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의원이 기존의 수구보수 세력과 선을 그으면서 “대구 출신이라고 절대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보지 말아달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유 의원은 강연 후 기자들과 만나서도 새누리당 복당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정의화 전 국회의장이 주도하는 '새 한국의 비전' 합류 가능성에 대해 “취지는 이해하지만 당장 참여할 생각은 없다"며 "저는 복당을 신청할 때 그 마음과 똑같고, 복당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본인과 윤상현 의원을 제외한 복당설에 대해선 “결정은 당이 하는 것”이라고만 답했다.

최근 여권 주자로 각광받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선 “지금은 유엔 사무총장 신분이지만 임기가 끝나면 자유롭게 출마할 수 있고, 국민들 입장에서도 선택의 범위가 넓어지니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일명 ‘상시청문회법’)에 찬성표를 던졌던 이유에 대해 “수사기관과 달리 국민들 입장에서 궁금한 걸 알려주는 창구는 국회 청문회밖에 없다”며 “그런 차원에서 국회가 청문회를 많이 하는 건 필요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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