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직한정치 좀 못하나|송진혁<본사정치부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2·12선거후 많은 사람들이 이제 정치풍년시절이 오겠구나하고 기대했던게 사실인데 지난6개월간을 돌이켜 보면 정치다운 정치는 별로 기억되는게 없다.
국회개원문제로 협상을 하는듯마는듯 40여일을 끌더니, 열린 국회에서도 접점없는 목소리크기 경쟁만 벌였던게 아닌가한다.
그러다가 다시 야당의 단독소집으로 국회가 열렸지만 폐회결의 말고는 아무것도 한게 없다.
그러는동안 학원노동에 연달아 문제가 터지고 정부는 강경조치를 연발했다. 정치는 이런 조치를 구경만하고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지난주 신민당이 전당대회를 마치고, 민정당이 같은 시기에 당직개편을 단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정치보다는 대결의 체제정비라고 풀이하고있다.
한마디로 우리 정치의 왜소화현상이 가속화되고있는 느낌이다.
「정치는 낭비요, 적을수록 좋다」는 것이 유신시대의 정치관이었는데, 대화와 의회주의를 소리높여 외치는 제5공화국에서 다시 이런 현상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 누구도 큼직큼직하게 짚는 사람이 없는것 같다. 선거후 지난 6개월간 사면 복권이란 단선의 문제에만 매달려 씨름하다가 아무런 소득없이 오늘의 대결분위기를 빚은 것만봐도 그렇고, 지난달 단독국회문제만 해도 여야간에 얽힌 사연이 그렇게 대단한것이 아니었는데도 그걸 푸는 정치력발휘를 볼수 없었다.
고위공직자나 여당간부는 보안과 함구령에나 익숙하고 여당에서는 지도부비판이 나오는 것을 무슨 괴변처럼 아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것 같다고 야당의 어느 초선의원에게 들으니 지난 개원국회때 상당수 야당의원들이 대통령의 국회입장때 박수를 치느냐, 안치느냐로 고심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비판하는 대통령에 대해 박수를 치는것이 주저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눈치를 살폈다는 것인데,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와 정치비판이 엄연히 별개의 문제인데도 왜 이런 사소한 문제에까지 신경을 써야했을까.
자유당시절, 무술경위를 동원해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가두고 보안법을 자유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이른바「24파동」이 있은후 야당측이 등원을 거부하는등 정국이 극도로 경색되자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어느 각료를 불러 『유석(조병옥박사)을 만나 내가 그런다고 국회에 나오라고 그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각료는 의아스런 마음으로 『그저 그렇게만 말하면 됩니까』고 했더니 이대통령은 『그렇게만 말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각료는 유석을 청해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대통령의 이말을 전했더니 유석은 묵묵히 듣고난후 큰 잔으로 정종만 몇잔이나 거푸 들이켜고는 불쑥 일어서더라는 것이다.
이 각료가 『어딜 가시느냐』고 하자 유석은 『가긴어딜 가겠소. 국회에 가서 등원한다고 기자회견을 해야지』라며 나갔다는 것이다.
『빈대잡기위해 초가삼간 태울수는 없다』는 유석의 유명한 발언은 이때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치인이라고 다 이승만 조병옥 갈은 배포나 그릇을 갖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소신은 따로 접어두고 지도부의 눈치코치나 살피고 마음속으로는 반대하면서도 내놓고 말은 하지못하는 풍토 같은것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여당에서드 과감한 지도층 비판발언이 나올수 있어야 하고, 야당에서도 두김씨 성토가 나올수 있어야 한다.
당간부라면 일일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고 협상할게 아니라 소신대로 협상을 하고 후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판한다고 손해를 보게되거나 소신껏 일을 처리한다고 실세하게 해서도 곤란하다.
내일이면 벌써 입추다.
보통 하한기라 하여 여름철이면 정치도 좀 뜸하고 휴가도 다녀오는 법인데 올해따라 유달리 찌는 더위에 정치 또한 숨막힐듯 복잡하게 돌아간다.
가을정국에 대한 불길한 전망이 널리 돌고있는 터에 정부·여당은 다시 학원안정법을 강행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한사 저지를 다짐하는 야당과 붙어도 한판 크게 붙을건 명약관화하다.
입추가 돼도 열기가 빠지기는 커녕 거꾸로 치솟는 양상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강행통과와 국한저지만 되뇔뿐 이렇다 할 정치는 하지도 않고 있거니와 할 기미도 안보인다.
가장 정치가 필요한 시기에 정치가 없는 셈이다. 답답한 일이다. 이길을 가면 결과가 뻔하다고들 벌써부터 야단인데 그 길로만 기를 쓰고 가고있는 형국이다.
여야 어느쪽에서든 누가 나서서 좀 큼직큼직한 정치를 해야 하지않을까.
좌익에 대해서는 여야가 없는것이 우리 정계의 오랜전통이다. 좌익혁명을 획책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여당의 문제일뿐 아니라 야당의 문제이기도하다. 정부가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어느날 갑자기 대처방안이라고 불쑥 내놓기보다는 야당과도 사전 상의할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서로 실상을 확인하고 대처방안을 공동 논의하는것이 순리일것이다.
시시콜콜한 문제나 챙기고 사소한 자극에도 못견뎌하는 정치로는 오늘의 이 복잡하고 험난한 국면을 타개하기 어렵다.
좀 큼직큼직하게, 나아가 듬직한 정치전개가 안될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