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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만 있는 나라 대한민국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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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9면

바로 어제, 강원도 강릉 모처에서 조금 색다른 음악회를 열었다. 클래식 음악을 연주할 용도로 만들어진 전용 공연장이 아니라 공연에 필요한 여러 부자재와 피아노를 대여해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 사용하는 길이 274cm의 ‘콘서트 그랜드’를 이 음악회에 빌려오고 싶어 잘 아는 피아노 숍에 문의를 했다.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기도 했던 조율사 선생님이 운영하는 이곳에 작년 모 야외음악회에서 사용했던 스타인웨이사의 콘서트 그랜드 ‘D모델’을 문의하니 선생님 왈, 그 악기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더 이상은 가지고 있는 게 없단다.


브랜드가 다른 피아노 회사 한 곳에 전화를 했다. 문의 결과 이곳에도 콘서트 그랜드 사이즈 모델은 단 한 개뿐인데, 그 모델마저 내가 문의하는 날짜에는 이미 예약이 차 있단다. 다른 일반 피아노 대리점에 또 전화를 걸었다. 스타인웨이 D가 딱 한 대 있기는 한데 그 동안 야외로 대여를 많이 나가느라 상태가 많이 나빠졌단다. 혹 콘서트 그랜드를 보유하고 있을 만한 또 다른 대리점은 없겠냐 물어보니 아마도 없을 거란다.


인구 1000만의 도시에서 대여할만한 콘서트 그랜드가 채 세 대도 되지 않는다니, 자못 충격적이었다. 문득 올 초에 방문했던 하노버의 한 피아노 숍이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베를린에서 내 음반을 녹음할 적에 인연을 맺은 조율사 아저씨의 개인 숍. 3월에 또 한번 있을 녹음 세션에서 사용할 피아노를 자기 숍에 와서 마음껏 골라보라는 그의 제안에 찾아간 곳이었다. 그 곳에는 스타인웨이의 D 세 대 말고도 그보다 건반 아홉개가 더 있는 희귀 모델인 뵈젠도르퍼사의 임페리얼 한 대, 또 뵈젠도르퍼의 일반 콘서트 그랜드 모델 한 대, 야마하사의 콘서트 그랜드 모델인 CF3X, 거기에 부티크 브랜드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수제 피아노를 만드는 슈타인그래버 운트 죄네 (Steingraber & Sohne)의 콘서트 그랜드 모델까지, 총 일곱 대의 콘서트 그랜드가 있었다. 모두 아저씨가 각 회사의 제조공장에서 직접 골라온 피아노로, 만들어진 지 몇 달이 채 안 되는 따끈따끈한 ‘신상’ 상태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아저씨의 꼼꼼한 도정을 거쳐 이곳저곳으로 대여도 되고 맘에 드는 누군가에게 팔리기도 하는 것이다.


하노버와 서울의 환경을 단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억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자니 4년 전 일본 도쿄에서 가졌던 또 다른 피아노 셀렉션이 떠올랐다. 이곳도 한 조율사 아저씨의 개인 숍이었는데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스타인웨이 D 두 대와 아주 곱게 잘 관리된 50년 넘은 연식의 스타인웨이 D 두 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그 어느 공연장에서도 좋지 않은 악기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국민성에 걸맞게 질리도록 까다로운 조건으로 구성된 악기 창고에서 지내며 365일,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조율 장인들의 전속 관리를 받는 악기들은 몇 년 동안 계속 연주를 해도 상태가 크게 나빠지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 공연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악기를 들여와도 평균적으로 1~2년 만 지나면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된다. 지방 공연장에 방문해서는 ’재작년쯤에 와서 연주했을 적에는 분명 괜찮은 악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1년 만에 이렇게 됐지?’ 하고 속으로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피아노 조율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이 국내에 있긴 있던가.


그런데 일본에는 좋은 피아노만 많은 것이 아니라 좋은 현악기도 많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가장 뛰어난 현악기 제작자로 기록되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일본음악재단’ 한 곳에서만 그가 남긴 바이올린을 총 14대나 보유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는 두군 데 기업의 문화재단에서 각 한 대씩, 총 두 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각기 최고의 상태인 14대의 스트라드를 서유럽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솔리스트들에게 대여해주는 이 이웃나라의 위엄이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부러워 죽겠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이런 어엿한 재단이 아니더라도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악기를 턱턱 사서 좋아하는 연주자에게 빌려주는 개인 갑부들이 널렸다.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의 스트라드도 일본의 한 억만장자 할머니가 선물로 사준 것이다.


‘좋은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연주자에게 악기란, 음식의 원재료와도 같은 최대 기본 요소 중 하나다. 부푼 기대를 안고 연주하러 간 곳에서 턱없이 부족한 악기와 씨름하다 진을 다 빼고 나면, 무대 위의 나에게 보내는 관객들의 총총한 눈빛을 마주보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이 나라에서는 언제쯤,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악기와 최고의 음악을 도모하는 호사를 누려볼 수 있을까.


손열음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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