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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같은 지하강 종유석 탐험, 고래상어와 유영 스릴 만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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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크릿 아시아 ③ 필리핀 팔라완

팔라완의 해변을 즐기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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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7107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이 수많은 필리핀의 섬 중에서 5번째로 큰 섬이 팔라완(Palawan)이다. 그러나 팔라완은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이름이다. 필리핀 관광청에 따르면 2015년 팔라완의 주도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를 방문한 한국인은 고작 1만9502명이었다. 지난해 필리핀을 찾은 한국인이 134만 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1.5% 정도만 팔라완에 들어갔다는 얘기다. 팔라완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서쪽으로 약 600㎞ 떨어져 있다. 동서의 폭은 40㎞에 불과하지만 남북 길이는 서울∼부산 거리와 맞먹는 425㎞이다. 필리핀 최후의 미개척지이자 마지막 비경 팔라완을 다녀왔다. 팔라완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기꺼이 몸을 던져야 했다.

경이로운 지하강 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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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팔라완에 있는 지하강 입구는 악마의 입처럼 흉하게 생겼다. 지하강은 석회암 동굴인데 침식 작용으로 석회암이 녹아 입구가 못난 이빨처럼 울퉁불퉁하다.

팔라완에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지하강(Underground River)이다. 지하강의 정확한 이름은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 강(Puerto Princesa Subterranean River)’ 국립공원이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세인트폴(Saint Paul·1028m) 산이 바다와 만나는 절벽 아래에 지하강이 있다. 필리핀인의 조상이 살았다는 석회암 동굴이 지각 변동과 해수면 상승으로 지금처럼 땅 밑을 흐르는 강이 되었다. 지하강 안에 각양각색의 종유석을 비롯해 작은 동굴과 폭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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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강 입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원숭이

강 전체의 길이는 8.2㎞이지만 일반인은 1㎞ 남짓만 들어갈 수 있다. 정원 10명 정도인 나룻배를 타는데 오직 사공이 젓는 노의 힘으로만 움직인다. 지하강에 들어가면 햇볕이 한 줌도 들지 않고 조명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가 펼쳐진다. 불빛은 사공의 헤드 랜턴뿐이다. 수 천년 동안 암흑에 적응해 살고 있는 동굴 속 생물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어둠의 세계라고 하면 공포와 두려움이 앞선다. 지하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절벽에 뚫려 있는 입구는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악마의 입 같았다. 입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짹짹 짹짹” 박쥐 소리만 들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 공간에서 박쥐소리는 여행자의 몸을 움츠리게 했다. 박쥐 8종이 살고 있다는데 날개 길이만 1m가 넘는 박쥐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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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강 속의 거대한 종유석.

수 천년의 시간이 빚은 자연 조각품을 차례로 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두려움이 가셨다. 대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났다. 사공이 가리키는 불빛에 따라 버섯·석류·옥수수 형태뿐 아니라 성모상·예수상·장군상 등의 이름이 붙은 종유석이 줄줄이 나타났다. 우리네 동굴에서 봤던 그것과는 크기가 달랐다. 우리의 것이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각상이라고 하면 지하강의 종유석은 거대한 조형물 같았다. 집채만한 종유석도 많았다. 가끔은 박쥐 배설물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작품’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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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강 투어 선착장 인근 해변.

지하강에 챔버(Chamber)라고 부르는 넓은 공간이 수십 개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폭과 길이가 100m 넘고 높이가 60m나 된다고 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왕복선도 조립할 수 있는 면적이란다. 관광객이 “와” 하고 탄성을 지르자 사공이 한마디 덧붙였다.

“놀라더라도 절대 입은 벌리지 마세요. 박쥐 똥이 입속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공의 경고에 모두가 입을 꼭 다물었다. 실제로 지하강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가 많아졌다. 물방울 같기도 하고 정말 박쥐 배설물 같기도 했다. 이 동굴 속에서 듀공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동물 화석과 필리핀 원주민의 유적도 발견됐다고 한다.

지하강 탐험은 어쩌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 투어였다. 오직 불빛을 비춘 곳만 보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약 40분간의 지하강 탐험을 하고 나오면서 지하강으로 출발하기 전 사방 비치(Sabang Beach) 선착장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사진만 간직해라, 발자국만 남겨라, 시간 이외의 아무것도 죽이지 마라, 추억만 간직해라(Take Nothing But Pictures, Leave Nothing But Footprints, Kill Nothing But Time, Keep Nothing But Memories).’

야생의 고래상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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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상어 투어 때 타는 필리핀 전통 배 방카.

지하강 탐험 다음날에는 바다로 향했다. 돌고래와 고래상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쿠아리움에 갇힌 고래상어가 아니라 바다에서 노니는 야생의 고래상어를 볼 수 있다는 말에 흥분이 됐다.

고래상어는 고래가 아니다. 상어다. 지구에서 가장 큰 어류다. 최대 18m까지 자라고 무게는 40t에 이른다. 2012년 제주 한화 아쿠아플라넷이 2마리를 들여왔는데 1마리는 죽고 1마리는 바다로 돌려보내 국내에선 볼 수 없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 교역에 관한 국제협약(CITES)’ 2종에 해당하는 희귀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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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구경 배.

푸에르토 프린세사 항구에 도착했다. 대형 여객선과 요트·화물선 등 큼지막한 배가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에게 큰 배를 가리키면서 “어떤 배를 타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대형 선박 중 하나려니 생각했지만 가이드가 가리킨 배는 지하강을 갈 때 탔던 배와 똑같은 나룻배였다. 폭 2m 길이 10m로 차양 하나 친 게 시설의 전부인 필리핀의 전통 배 ‘방카(Bangk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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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고래를 찾고 있는 선원.

방카는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며 술루해(Sulu Sea)로 향했다. 팔라완 섬과 민다나오(Mindanao) 섬 사이의 술루해는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넓은 바다다. 이 바다에 참돌고래와 고래상어가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1시간이면 돌고래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3시간이 다 되도록 돌고래는 보이지 않았다. 바다가 한층 거칠어졌고 양옆으로 보이던 섬도 사라졌다. 눈 앞에는 오직 수평선만 또렷했다.

이제 세상의 색깔은 세 가지 뿐이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검은 바다. 한 줌 빛이 들어오지 않은 지하강보다 햇볕 쨍쨍한 바다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가끔 갈매기와 날치만 보일 뿐이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의 주인공 파이가 된 기분이었다.

선장이 “어제는 돌고래가 많았는데 오늘은 안 보인다. 이제 고래상어를 보러 간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 쪽배에는 조타 핸들만 있을 뿐 어군 탐지기나 항법장치도 없었다. 선장은 “경험과 맨눈으로 돌고래를 찾는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술루해에서 돌고래 찾기’인 셈이었다.

다시 술루해를 헤집고 다녔다. 거친 파도에 탑승객 8명이 지쳐갔다.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멀미를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속으로 ‘괜히 왔어’라며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1시간쯤 흘렀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선원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래 상어 한 마리가 보였다. 관광객 중 한 명이 스노클링 장비와 오리발을 착용하고 잽싸게 바다에 뛰어들었다. 독일인 여성 헬렌이었다. 그는 필리핀에 있는 한 해양 척추동물 연구소의 연구원이라고 했다. 헬렌은 “여기는 수족관이 아니라 바다 한가운데다. 고래상어를 보기 위해서는 재빨리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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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루해에서 본 새끼 고래상어. 길이가 2m 정도였다.

30분쯤 지나자 다시 고래상어가 나타났다. 헬렌을 따라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에 남은 관광객들이 “프런트(앞)! 프런트!”라고 외치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렸다. 5m 전방에서 고래상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나 5초 뿐이었다. 고래상어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수족관의 고래상어는 다이버와 놀아줬지만 야생의 고래상어는 사람을 피했다. 배에 오르니 헬렌이 “세 살짜리 암컷이었다”고 했다. 고래상어와의 유영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영상] 필리핀 팔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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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정보=한국에서 필리핀 팔라완으로 가는 직항은 없다. 에어아시아(airasia.com)를 이용하면 마닐라를 경유해 팔라완까지 갈 수 있다. 에어아시아의 필리핀 계열사 에어아시아필리핀이 인천~마닐라 노선 하루 한 편, 마닐라~팔라완 노선 하루 4회 운항한다. 한국에서 마닐라까지는 약 4시간, 마닐라에서 팔라완까지는 약 1시간 30분 거리다. 팔라완의 주도인 푸에르토 프린세사에는 숙박시설이 많은데 그중 프린세사 가든 아일랜드 스파 앤 리조트(princesagardenisland.com)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1박 8500페소(약 21만원)부터. 1페소는 약 25원(5월20일 기준). 지하강투어 어른 250페소(약 6300원), 고래투어 2300페소(약5만8000원). 이밖에도 혼다만(Honda Bay)에 있는 3개의 섬을 돌아다니는 호핑투어 1300페소(약 3만3000원), 석회암 동굴을 탐험하는 우공 동굴 탐험 및 짚라인은 450페소(약 1만2000원)이다. 팔라완은 한국보다 1시간 늦다. 바다가 잔잔한 3월부터 7월 초까지 여행 최적기다. 그러나 이때 낮 기온이 40도 안팎이어서 선크림·모자 등을 챙겨야 한다. 모기 기피제도 필수다. 자세한 정보는 필리핀관광청 한국사무소 홈페이지(7107.co.kr)참조.

글·사진=이석희 기자 seri19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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