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희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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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 인도네시아 골문안의 그물이 출렁일 때 8만 관중이 일제히 환호와 함성을 올렸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축구1차전후반29분의 싯점에서 서울잠실올림픽스타디움을 꽉메운 관중이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활기를 찾았다.
어찌 그라운드뿐이랴. TV를 바라보던 전국의 국민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었다.
그게 자발적 일체감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기 일사불란한 합의가 있었다. 마음의 희열도 있었다.
국민총화가 저절로 이뤄진 순간이다.
모든 걸 잊고 통쾌한 희열에 잠길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삶의 찌꺼기들을 배설하고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전한다는 것은 큰 힘이다.
그 귀중한 효능을 스포츠가 마련해 준다. 건강한 대중의 심령정화다.
카타르시스 (정화) 는 꼭 훌륭한 예술의 산물만은 아니다. 뛰어난 스포츠도 그걸 만들어 준다.
대중이 함께 일체감속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건 더 뜻깊다. 잠실스타디움뿐 아니라 전국의 국민이 한마음으로 환희에 휩싸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는 괴로움의 시간이 길었던걸 상기해야한다.
선수들은 몸이 무거웠다. 제대로 뛰질 못했다. 기동력과 페스웍도 제대로 구사되지 못했다.
투톱 시스팀은 무력했다. 단조로운 센터링은 번번이 실패했다. 코칭 스태프의 작전은 너무 안이했다.
작전은 변화와 다양성이 있어야한다. 조직력과 기동성이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작품을 볼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깝다.
런던 월드컵에 나섰던 북한팀은 기동력과 조직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공을 향해 4명의 선수가 사다리꼴로 뛰어오르는 모습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우리앞엔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오는 30일 인도네시아를 다시 물리쳐도 일본-홍콩의 승자가 또 기다리고 있다. 일본팀 감독은 21일에도 잠실경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감독과 선수와 국민들의 합심이 더 요구되고 있다.
승리의 희열은 선수들의 체력·기량과 정신력이 만든 작품이다. 코칭 스태프의 작전과 용병은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국민의 일체를 이루는 성원의 산물이다. 그게 억지로 만들어지는 희열이며 일체감이 아닌걸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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